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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명시들

녹슨 경의선(京義線) / 강인섭

by 솔 체 2019. 12. 29.

녹슨 경의선(京義線)

강인섭




서울, 부산 신의주까지
남북(南北)으로 길게 뻗어
발부리에 채이는 아픔으로
머리 끝까지
전율(戰慄)하던 경의선(京義線)
임진강 철교(鐵橋) 앞에서 가뿐 숨소리를
몰아쉬며
헐떡이던 기관차(機關車)는
논두렁에 처박힌 채
파선(破船)의 잔해(殘骸)처럼 녹슬어 간다.

한때는 대동강 바람도 실어 나르고
독립선언문(獨立宣言文)도 방방곡곡에 뿌려주던
경의선(京義線)
해방둥이의 키보다 크게 자란 잡초 속에서
동강난 허리를 껴안고
동서남북으로 뒤채는 아픔이여!
아, 녹슨 쇳덩이는
오늘도 북(北)을 향해 우짖고 있다.

그 날 남과 북을 오가던 진한 포성(砲聲) 속에서
진로(進路)를 잃어버린 열차(列車)의 급정지(急停止)
끊어진 다리 앞에서
뚜뚜…… 비명(悲鳴)처럼 울부짖던
기적(汽笛)의 종적 앞에

그 육중한 기관차(機關車)가 끌고 가던 숱한 사연들
산을 넘고 벌판을 달려온 흐느낌에
각혈( 血)처럼 매달리던 향수(鄕愁)의 덩어리들……

그 곳에는 지금도
길이 트이면 맨 먼저 임 앞에 달려가리라던
맹세(盟誓)의 일부인(日附印)을 찍어 기차보다
먼저 보낸 사나이의 굳은 약속(約束)이며
늙은 뼈를 고향 땅에 묻겠다는
어버이의 소원(所願)을 업고 가던 효성(孝誠)이
녹슨 차바퀴에 깔려 풀벌레 소리로 울고 있다.

동강난 거울 조각을 가슴 깊이 간직한
승객(乘客)들이 줄지어 기다리는 플렛홈에는
선로(線路) 위를 달리지 못하는 기관차(機關車)의
녹슨 아우성.
북녘 하늘에서 한숨 섞어 날려보낸 민들레가
무성한 잡초 사이에 씨를 내리고
서울의 하늘 위를 떠가던 구름이
백두산 천지(天池)를 향해 휘적휘적 걸음을 재촉한다.

남(南)에 눈이 내리면 북(北)녘 강물이 얼고
연백평야에 진 장마는
임진강 물을 불리지만
서울을 떠난 열차는 평양에 닿지 못한다.

이쪽 산에서 한글로 소리치면
저쪽 산 메아리가 한글로 대답하고
묘향산 골짜기에서 떠난 눈보라는
한라산 꼭대기에 흰 눈을 뿌리는데
문산역을 떠난 기적(汽笛)은
어찌하여 허공(虛空) 밖에 더듬지 못하는가.

아, 사랑하는 두 손목을 떼어놓고
오가며 울어주던 성묘(省墓) 길을 막아놓고도
미친 짐승처럼 울지 못하는 녹슨 마음들,
남과 북을 오가던 열차(列車)의 운행(運行)을
가로막은 자가 누구냐.

한때는 시골 소년(少年)의 꿈도
서울까지 태워다 주고
광야(曠野)를 달리는 벅찬 울음으로
메마른 논밭을 흔들어 놓던 경의선(京義線)
그 거대한 기관차(機關車)를 잡초 위에
쓰러뜨린 자가 누구인가.

아, 녹슨 철로(鐵路)에 귀를 대어보면
아득히 피 흐르는 소리
가슴으로 가슴으로 달려가는
고구려(高句麗) 무사(武士)의 말발굽 소리.

참으로 우리들
닫힌 가슴들을 펑펑 터뜨리며
번득이는 햇볕으로 녹슨 레일을 닦아내고
한줌씩의 땀방울을 뿜어
쓰러진 기관차(機關車)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하거늘

아, 총구(銃口) 사이로만 서로 건너다보는
눈망울이여
피안(彼岸)처럼 돌아앉아
칼을 갈고 있는 슬픈 그림자여.

아! 녹슨 쇳덩이는
오늘도 북(北)을 향해 우짖고 있다.


* 시집 『녹슨 京義線』(196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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