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海邊)가의 무덤 김광균 꽃 하나 풀 하나 없는 황량(荒凉)한 모래밭에 묘목(墓木)도 없는 무덤 하나 바람에 불리우고 있다. 가난한 어부(漁夫)의 무덤 너머 파도는 아득한 곳에서 몰려와 허무한 자태로 바위에 부서진다. 언젠가는 초라한 목선(木船)을 타고 바다 멀리 저어가던 어부의 모습을 바다는 때때로 생각나기에 저렇게 서러운 소리를 내고 밀려왔다 밀려가는 것일까. 오랜 세월에 절반은 무너진 채 어부의 무덤은 잡초(雜草)가 우거지고 솔밭에서 떠오르는 갈매기 두어 마리 그 위를 날고 있다. 갈매기는 생전에 바다를 달리던 어부의 소망(所望)을 대신하여 무덤가를 맴돌며 우짖고 있나 보다. 누구의 무덤인지 아무도 모르나 오랜 조상때부터 이 사람들은 바닷가에서 태어나 끝내는 한줌 흙이 되어 여기 누워 있다. 내 어느 날 지나가던 발길을 멈추고 이 황토(黃土) 무덤 위에 한잔 술을 뿌리니 해가 저물고 바다가 어두워 오면 밀려오고 또 떠나가는 파도를 따라 어부의 소망일랑 먼― 바다 깊이 잠들게 하라. |
설야
김광균
어느 머언 곳의 그라운 소식이기에
이 한 밤 소리 없이 흩날리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워가며
서글픈 옛 자췬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의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찬란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추일 서정
김광균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내인 채
한 가닥 구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위에 샐로판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 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 간다
와사등
김광균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高層) 창백한 묘석(墓石)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思念)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니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균(金光均, 1914년 ~ 1993년)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시인부락’동인으로 모더니즘 시 운동에 자극을 받아 “시는 하나의 회화이다”라는 시론을 전개하면서 주지적·시각적인 시를 계속 발표하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고, 후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업가로도 활동하였으며, 시집에 《와사등》, 《기항지》, 《황혼가》 등이 있다.
'좋 은 시 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정주 / 행진곡(行進曲) (0) | 2014.09.25 |
---|---|
박두진 / 서한체(書翰體)외 9편 (0) | 2014.09.24 |
박목월 / 겨울 선자(扇子) 외 2편 (0) | 2014.09.24 |
조지훈 / 여운(餘韻) (0) | 2014.09.24 |
김기림/ 세계의 아침외 2편 (0) | 2014.09.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