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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 은 시 와 글

박두진 / 서한체(書翰體)외 9편

by 솔 체 2014. 9. 24.

서한체(書翰體)

박두진



노래해다오. 다시는 부르지 않을 노래로 노래해다오. 단 한번만 부르고 싶은 노래로 노래해다오. 저 밤하늘 높디높은 별들보다 더 아득하게 햇덩어리 펄펄 끓는 햇덩어리보다 더 뜨겁게, 일어서고 주저앉고 뒤집히고 기어오르고 밀고 가고 밀고 오는 바다 파도보다도 더 설레게 노래해다오. 꽃잎보다 바람결보다 빛살보다 더 가볍게, 이슬방울 눈물방울 수정알보다 더 맑디맑게 노래해다오. 너와 나의 넋과 넋, 살과 살의 하나됨보다 더 울렁거리게, 그렇게보다 더 황홀하게 노래해다오. 환희 절정 오싹하게 노래해다오. 영원 영원의 모두, 끝과 시작의 모두, 절정 거기 절정의 절정을 노래해다오. 바닥의 바닥 심연의 심연을 노래해다오.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넘어 산 넘어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넘어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라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찱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라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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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박두진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멀리서 온다

하늘은,
멀리서 온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온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며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초가을
따가운 햇볕에
목을 씻고

내가 하늘을 마신다.
목말라 자꾸 마신다.

마신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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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사랑앞에

 

박두진




말씀이 뜨거이 동공에 불꽃 튀는
당신을 마주해 앉으리까 라보니여.
발톱과 손바닥과 심장에 생채기 진
피 흐른 골짜기의 조용한 오열
스스로 아물리리까 이 상처를 라보니여.
조롱의 짐승 소리도 이제는 노래
절벽에 거꾸러짐도 이제는 율동
당신의 불꽃만을 목구멍에 삼킨다면
당신의 채찍만을 등빠다에 받는다면
피눈물이 화려한 고기 비늘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발광이 황홀한 안식이 아니리까 라보니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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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박두진

눈 같이 흰 옷을 입고 오십시요. 눈 위에 활짝 햇살이 부시듯 그렇게 희고 옷을 입고 오십시요.

달 밝은 밤 있는 것 다아 잠들어 괴괴-한 보름밤에 오십시요...빛을 거느리고 당신이 오시면, 밤은 밤은 영원히 물러간다 하였으니, 어쩐지 그 마지막 밤을 나는, 푸른 달밤으로 보고 싶습니다. 푸른 월광이 금시에 활닥 화안한 다른 광명으로 바뀌어지는, 그런 , 장엄하고 이상한 밤이 보고 싶습니다.

속히 오십시요. 정녕 다시 오시마 하시었기에, 나는, 피와 눈물의 여러 서른 사연을 지니고 기다립니다.

흰장미와 백합꽃을 흔들며 맞으오리니, 반가워, 눈물 머금고 맞으오리니, 당신은, 눈 같이 흰 옷을 입고 오십시요. 눈 위에 활작 햇살이 부시듯, 그렇게, 희고 빛나는 옷을 입고 오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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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송

박두진



북망이래도 금잔디 기름진데
동그만 무덤들 외롭지 않어이

무덤 속 어둠에 하이얀 촉수가 빛나리
향그런 주검의 내도 풍기리

살아서 설던 주검 죽었으매 이내 안 서럽고
언제 무덤 속 화안히 비춰줄 그런 태양만이 그리우리

금잔디 사이 할미꽃도 피었고 삐이 삐 배 뱃종 뱃종 멧새들고 우는데
봄볕 포군한 무덤에 주검들이 누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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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고독

박두진


당신을 언제나 우러러 뵈옵지만
당신의 계신 곳을 알지 못합니다.
당신의 인자하신 음성에 접하지만
당신의 말씀의 뜻을 알 수 없읍니다.
당신은 내게서 너무 멀리에 계셨다가
너무너무 어떤 때는 가까이에 계십니다.
당신이 나를 속속들이 아신다고 할 때
나는 나를 더욱 알 수 없고
당신이 나를 모른다고 하실 때
비로소 조금은 나를 압니다.
이 세상 모두가 참으로 당신의 것
당신이 계실 때만 비로소 뜻이 있고
내가 나일 때는 뜻이 없음은
당신이 당신이신 당신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에게서만 나를 찾고
나에게서 당신을 찾을 수 없읍니다.
밤에도 낮에도 당신 때문에 사실은 울고
나 때문에 당신이 우시는 것을 압니다.
천지에 나만 남아 나 혼자임을 알 때
그때 나는 나의 나를 주체할 수가 없읍니다.
어디로도 나는 나를 가져갈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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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내비

박두진


잔내비 칼 휘두른다.
꽃밭이고 소년이고 양의 떼고 없다.
피 보면 미친다는
이리 넋에 취하여
어쩌나 둘러서서 침묵하며 지켜보는
대낮 여기 잔내비떼
칼 휘두른다.
심장을 마구 찔러 목숨 다치고
은 장식 조상이 내린 거울 깨뜨리고
꽃밭 함부로 낭자하게
개발 짓밟어
남녘에서 들뜬 바람
독 어린 발정
죽을 줄 제 모르고
칼 휘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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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밭에 누워

박두진


바람에 쓸려가는 밤하늘 구름 사이
저렇게도 파릇한 별들의 뿌림이여
누워서 반듯이 바라보는
내 바로 가슴 내 바로 심장 바로 눈동자에 맞닿는
너무 맑고 초롱한 그 중 하나 별이여
그 삼빡이는 물기어림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려 하지만
무심하게 혼자 누워 바라만 보려 하지만
오래오래 잊어버렸던 어린적의 옛날
소년쩍 그 먼 별들의 되살아옴이여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고 있으면
글썽거려 가슴에 와 솟구치는 시름
외로움일지 서러움일지 분간없는 시름
죽음일지 이별일지 알 수 없는 시름
쓸쓸함도 몸부림도 흐느낌도 채 아닌
가장 안의 다시 솟는 가슴 맑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울고 싶음이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리지름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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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七月)의 편지

박두진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사자(獅子) 새끼 냄새가 난다.
칠월(七月)의 태양(太陽)에서는 장미(薔薇)꽃 냄새가 난다.

그 태양을 쟁반만큼씩
목에다 따다가 걸고 싶다.
그 수레에 초원(草原)을 달리며
심장(心臟)을 싱싱히 그슬리고 싶다.

그리고 바람,
바다가 밀며 오는,
소금 냄새의 깃발, 콩밭 냄새의 깃발,
아스팔트 냄새의, 그 잉크빛 냄새의
바람에 펄럭이는 절규―.

칠월(七月)의 바다의 저 출렁거리는 파면(波面)
새파랗고 싱그러운
아침의 해안선(海岸線)의
조국(祖國)의 포옹(抱擁).

칠월(七月)의 바다에서는,
내일의 소년들의 축제(祝祭) 소리가 온다.
내일의 소녀들의 꽃비둘기 날리는 소리가
온다.

<해, 청만사, 1949>

 


 

박두진 /박두진

 

박목월·조지훈과 함께 청록파 시인이다. 그리스도교 정신을 바탕으로 초기에는 자연을 읊다가 차츰 사회현실에 대한 의지를 노래했다. 호는 혜산(兮山).

1948년 한국청년문학가협회 시분과 위원장과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을 역임했고, 1949년에 결성된 한국문학가협회에 가담해 민족주의계열의 문학건설에 힘썼다. 1955년 연세대학교 전임강사가 된 뒤, 1959년 조교수로 취임했다가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대한감리회 신학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에 출강했으며, 1970년 이화여자대학교 부교수를 거쳐 같은 해 다시 연세대 교수로 취임해 1981년 정년퇴임했다. 그 뒤 단국대학교 초빙교수로 있다가 1986년 추계예술학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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