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선자(扇子)
박목월
오전에는
제자의 주례를 보아주고
오후에는
벼루에 먹을 간다.
이제
난(蘭)을 칠 것인가, 산수(山水)를 그릴 것인가.
흰 종이에
번지는 먹물은 적막하고.
가슴에 붉은 꽃을 다는 것과
흰 꽃을 꽂는 것이
잠깐 사이다.
겨울 부채에
나의 시(詩),
나의 노래,
진실은 적막하고
번지는 먹물에 겨울 해가 기운다.
개안(開眼)
박목월
나이 60에 겨우
꽃을 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神이 지으신 오묘한
그것을 그것으로
볼 수 있는
흐리지 않은 눈
어설픈 나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채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꽃
불꽃을 불꽃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열렸다.
세상은
너무나 아름답고
충만하고 풍부하다.
神이 지으신
있는 그것을 그대로 볼 수 있는
至福한 눈
이제 내가
무엇을 노래하랴.
神의 옆자리로 살며시
다가가
아름답습니다.
감탄할 뿐
神이 빚은 술잔에
축배의 술을 따를 뿐.
길처럼
박목월
머언 산 구비구비 돌아갔기로
山구비마다 구비마다
절로 슬픔은 일어......
뵈일 듯 말듯한 산길
산울림 멀리 울려나가다
산울림 홀로 돌아나가다
......어쩐지 어쩐지 울음이 돌고
생각처럼 그리움처럼......
길은 실낱 같다
기계(杞溪 ) 장날
박목월
아우 보래이
사람 한 평생
이러쿵 살아도
저러쿵 살아도
시쿵둥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저렁
그저 살믄
오늘같이 기계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베
안 그런가 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
지게목발 받혀 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 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 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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