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체험으로부터 길어올린 미학/나 호열4
(2) 사실적 체험에서 사색의 경지로 나아감
지난 사월은 잔인하였습니다. 나라의 곳곳에서 산불이 일어나서 아까운 삼림이 폐허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실로 엄청난 국력의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강원도 고성지역은 계속해서 산불의 피해를 입어 다른 지역보다 더 큰 피해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방장비를 완비해야 한다!. 산불예방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참으로 많은 이야기들이 들끓었었습니다. 산불이 나서는 안됩니다. 아까운 인명과 삼림이 파괴되어서는 더더욱 안됩니다.
미국이나 호주 같은 큰 나라에서도 산불이 자주 일어난다고 들었습니다. 삼림의 면적이 넓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미국에서는 자연발생적이고 인적인 피해를 주지 않으면 산불을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에 대한 찬반 양론이 비등하지만 자연의 섭리는 200년에 한 번 꼴로 산불이 일어나서 생태계를 새롭게 구성한다는 학설이 설득력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00년에 한 번 큰 불이 난다는 사실은 우리의 감각적 체험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중국대륙에서 불어오는 황사가 온갖 오염물질을 옮기기도 하지만 토양을 비옥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사실 또한 그렇지요.
폐허 이후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며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한 편의 시를 짓는데 있어서 사실적 표현(체험)은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모든 시구가 시적 표현(비유)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사실적 진술이 시적 진술보다 훨씬 많습니다. 위의 시는 자연의 재생성을 사실적으로 진술합니다. 그런데 중간 부분의 3행은 사실적 진술이 아니라 체험을 넘어서서, 체험을 꿰뚫은 진실입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언명은 나에게 주어진 자연적 현상을 투시해서 얻어낸 결과입니다.
(3) 의인법을 활용하라
시인들이 소재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는 말은 모든 대상,-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사건이든간에 -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나와 동일한 인격으로 구름과 달, 별과 바람을 대한다는 것이고 그것들이 전해주는 말들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시편 중에서 뛰어난 작품들은 주로 2 부, 3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는데 그 부분들은 나무와 꽃들을 의인화하여 삶의 체험과 등치시킨데 있습니다.
「복숭아 나무」,「가죽나무」, 「숲」,「겨울나무」등의 시편은 소재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매우 섬세하게 관찰하고 의인화해서 이루어낸 삶의 진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죽나무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
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
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
어떤 줄기는 비비꼬여 있는 걸 안다
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
다만 보잘 것 없는 꽃이 피어도
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
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
편안히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
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
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이 숲의 다른 나무들에 비해 볼품이 없는 나무라는 걸
내가 오래 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 한 가운데를 두 팔로 헤치며
우렁차게 가지를 뻗는 나무들과 다른 게 있다면
내가 본래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는 것 뿐이다
그러나 누군가 내 몸의 가지하나라도
필요로 하는 이 있으면 기꺼이 팔 한짝을
잘라 줄 마음 자세는 언제나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내게 그것도 기쁨이겠기 때문이다
가죽나무는 장자에도 나오는, 쓸모없어 베일 염려 없이 오래 사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그런 가죽나무를 화자 자신으로 삼고 가죽나무가 말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아주 작지만 소중하고, 힘 없지만 더 힘 없는 사람들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민중들의 삶을 의인화하므로서 앞의 시들에서 보이는 지사적 토로보다 더 강력한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들은 소재에 대한 면밀한 관찰 없이는 지어낼 수 없습니다. 의인법이라는 것은 한 마디로 관찰의 극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물의 관찰만으로 이루어진 시를 하나 읽어 볼까요
잎차례
하늬바람에 모과나무잎이 올라오는 걸 보니
이파리 하나 내는 데도 순서가 있다
해 뜨는 쪽으로 하나 내보내면
해 지는 쪽으로도 하나를 내고
그 사이에 양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잎 하나를 꽃 세워둔다
좌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꼭 그렇게 잎을 낸다
밤나무나 동백나무도 오른쪽에서 잎이 나면
다음에는 왼쪽에서 잎이 돋는다
마주나는 건 마주나고 돌려나는 건 꼭 돌려난다
하찮은 들풀이나 산기슭 작은 꽃들도
꽃잎이 다섯 개인 건 꼭 다섯 개만 내고
여덟 개인건 여덟 개만 낸다
냉이나 민들레나 우리가 보기엔 그저
이무렇게나 피어있는 들꽃도
저희끼린 다 정교한 질서를 따르고
생명의 사소한 일 하나를 끌어가는 데도
반드시 지킬 줄 아는 차례가 있다
이파리 하나에도
이 시에서 시인의 주관적인 주장은 마지막 3행을 제외하고는 전혀 없습니다. 사실적 관찰만으로도 얼마나 감동적인 시를 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됩니다. 어렵거나 장식적인 어휘 또한 눈에 띠지 않습니다. 매우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진술을 통해서 자연의 보이지 않는, 하잘 것 없는 것들의 질서지움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우리 주위를 잘 살펴보면 시로서 형상화할 수 있는 진실과 생명현상이 곳곳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시적 감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세밀한 관찰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감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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