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체험으로부터 길어올린 미학/나 호열3
(1) 화자가 "나"로 드러난 경우
봄
아무도 들꽃이 겨우내 비겁하였다고 말하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나 같은 사람도 앞장서서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살았다 우리들은
힘은 없지만 비겁하지 않으려 했다
아직도 크게 달라질 것 없어
마음 허전하기 이를 데 없지만
나 같이 허약한 사람도 쫓기며 끌려가며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위해 싸웠다고
그 생각을 하며 이 저녁 자신을 위로한다
꽃샘바람에도 순이 터 올라오는 나뭇가지가 보인다
산천에 봄소식이 오고 강물이 풀려도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 있는 게 가슴 아프다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돌아보는 이 저녁에
이 시의 모티브는 이른 봄, 아무 것도 다시 돋아오를 것 같지 않고 죽어서 더 이상 잎을 낼 것 같지 않던 나무에 푸르름이 솟는 광경을 통해서 드러나는 심상입니다.
내가 아직 불법이란 딱지에 묶여있는 게 가슴 아프다
평범한 시인이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시대는 과거 속에 존재하며 그 투쟁은 인간으로서 비겁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화자는 과거의 사건으로부터 복권되지 않은 상태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 시는 어떤 상태를 드러내고 화자의 심정을 드러내지만 더 이상의 이미지의 발산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시의 후반부에서 이른 봄의 소재성이 부각되고 있기는 하지만 4행의 시대, 나같은, 희망, 젊은 날을 다 바쳐 싸우고
등등의 어휘로부터 독자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는 듯 싶습니다.
『부드러운 직선』의 첫 번 째 시 「길」도 위와 같은 지적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화자의 체험은 이 시대를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 지에 대한 진지성과 투쟁성을 지니고 있지만 화자의 의도가 너무 확연히 드러나면 날수록 오히려 독자들은 그 의도를 부담스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시 읽기는 發憤이 아니라 정서의 기묘한 가라앉음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를 쓸 때 1)주제를 확실하게 인식하고 그 주제에 알맞는 소재를 찾아서 창작을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2)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나 感想에서 야기되는 시 쓰기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한 편의 시에서 주제와 소재를 명확하게 판명해 내기란 그렇게 쉬운 작업이 아니고 굳이 그런 식으로 시를 짓거나 읽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만, 시를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연습을 많이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시인은 분명 일반인보다 다양하고 특이한 체험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하고, 일반인들보다 깊은 통찰의 눈으로 사물과 사건을 해석하는 감각과 예지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해 본다면 시인의 세계와 인간, 자연에 대한 인식과 주관적인 태도가 시의 소재를 다양하게 다룰 수 있는 기법을 생성시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습작을 하는 분들의 어려움은 소재로부터 감흥을 이끌어내고 그 감흥을 시로 옮기려 하는 수동적 태도를 벗어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꽃이 핀다. 비가 온다. 안개가 끼었다. 바람이 분다. 등등의 자연적, 외적인 조건이 나에게 다가올 때 시적 반응을 하거나 사랑을 하거나 이별을 하거나 등등의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사건이 자극적으로 반사될 때 시작에의 욕구를 느낀다는 점입니다.
대상이 나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시작에의 욕구는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시인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주관적이면서도 독자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인생관과 철학이 확립되어 있어 소재를 자유자재로 취사선택할 수 있고 시에 녹여낼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소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꽃" 자체에 대하여 시를 쓰려고 하면 할수록 "꽃"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 제한되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개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소재는 연극에서의 무대장치와 같은 것입니다.
몇몇의 시인- 도종환 시인도 포함되지만-을 제외하고는 극적인 삶의 체험을 가진 시인들은 많지 않습니다. 發話者로서의 시인은 작품에 나타난 세계에 대해서 일정부분 책임을 가져야할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반영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부분이 다른 예술 장르와 변별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운동의 추억
추억으로 운동을 이야기하는 사람 많다
운동한 기간보다
운동을 이야기하는 기간이 더 긴 사람이 있다
몸으로 부닥친 시간보다
말로 풀어놓는 시간이 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에게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운동
현재가 없는 운동을 현재로 끌어오는
그들의 공허함
위의 시는 한 시대가 끝난 후 태평성대(?)에 와서 투사연하는 위선에 가득찬 사람들을 쓸쓸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슬픔이 배어 있습니다. 옆으로 비껴가는 삶을 살았으면서도, 전방에서 총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들이 구국과 민족을 이야기하는 현실을 짚어내는데 이 시 또한 너무도 충실하게 사실을 사실답게 표현하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시적 감흥을 제한하는 역효과를 낳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기억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의 체험, 사실의 전달에 주안점을 둘 때 시의 완성도를 현저하게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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