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시의 언어에 대하여
강사/윤재순
덩쿨장미는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뻗어 오른다
담장 위로 지붕 위로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휘어지면서 끝쯤에 이르러
꽃을 달고 얼굴을
들어 내 보인다
그러나
따로 이름은 없다
-------이병훈의 <가시> 전문
이병훈의 시 <가시>는 인식의 시에 속한다. 인식의 시에서는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력의 예민함이 관건이다. 똑 같은 대상이라도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된 세계를 획득했을 때 설득력을 갖는다. 자칫 이런 유의 시가 빠지기 쉬운 함정은 누구나 쉽게 하는 평이한 인식을 평이한 진술로 드러냈을 때이다. 그 대 독자는 전연 시적 긴장을 느끼지 못한다. 시의 생명인 경이감도 창출되지 못한다. 인식의 내용이나 표현이 경이감으로 전달되지 못하면 시는 예술로서의 존재 가치를 획득할 수 없다.
시 <가시>는 서술적인 시어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부사어와 동사를 통하여 시적 대상의 움직임이나 변화과정을 묘사하거나 진술한다. 덩쿨장미가 꽃을 달기까지의 과정을 가시를 맞대고, 아프게, 서로 얽히면서 찌르고 찔리면서 또는 휘어지면서 등의 서술어를 통하여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생명 탄생의 배면에 준재하는 인고의 세월을 감지하게 한다. 찔리는 아픔과 서로 얽히는 고달픔과 휘어지는 좌절의 시간을 인내한 결과로서 하나의 생명이 존재하게 된다는 인식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이런 인식의 내용을 직접 설명하지 않는다. 덩쿨장미가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하여 형상화하는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물론 외적 현상만을 제시하지 않는다. 상당히 내면화된 현상이다. 이 점이 시적 인식의 울림으로 전달되는 근거다. 거기에다 생명 탄생의 결과를 놓고 따로 이름은 없다고 진술함으로써 생명의 근원적 허무를 암시한다. 무릇 모든 생명적 존재는 일회성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인식의 공명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시적 상상력의 폭은 좁다. 원거리 이미지의 연결이 없기 때문이다. 서술적 시어로는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미지의 확장이 어렵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주고 있다. 단조로운 느낌, 어떤 틀 안에 갇힌 듯한 한계성을 느끼게 한다.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파도가 싱싱한 기억을 톡톡 건져낸다.
"나의 20년" 유행가 가사가 울려 퍼지던 사춘기 시절
철 이른 비인 해수욕장은
내 퇴화된 꼬리뼈에 자꾸만 방울을 달아준다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는 방울 소리가 난다
벚꽃이 도톰한 입술로 휘파람 소리를 내던 열아홉 살
작약도 별빛을 모두 삼킨 활화산이 된다.
백야의 아찔한 울렁거림으로 폭발하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뼈 속으로 내리는 장대비를 맞던 어느 해 추운 겨울
해운대는 퉁퉁 부풀어오른 상처를 안고 넘어진다.
온종일 그 곳에서
하얀 얼굴로 내 이름을 지워낸다.
꽃샘추위에 마음을 베어버린 어느 해 새벽
무작정 강릉행 고속버스를 탄 싸락눈이
밤새 경포대에 뛰어들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너를 안고
나도 바다에 뛰어든다.
수첩 속에서 바다가 꿈틀거린다.
내가 바다가 된다.
------박 윤의 <내 수첩에는 바다가 들어 있다> 전문
박 윤의 시는 생동감이 넘친다. 감각화된 시들이 그런 느낌을 더욱 입체화시키고 있다. 살아 숨쉬는 언어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박 윤은 언어를 이미지로 갈고 닦는 조련사로서의 역량을 보인다. 물론 이 시의 언어가 일상성의 지시 기능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시인의 의식으로 해서 일상성을 환기하는 지시적 기능을 일정 부분 갖는다. 그러나 그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비약적 이미지를 만드는 기법에서 이 시인의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능력을 보게 된다.
이 시에서 표현되고 있는 바다는 추억 속에 들어 있는 19살 사춘기 시절에 만났던 과거의 바다다. 그러니까 시인의 의식 속에 자리 하고 있는 이미 나와 일체가 된 바다다. 바다가 수첩 속에 있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를 내포한다. 바다는 과거의 다른 기억과 중첩되어 의식 속에서 살아 있다. 그래서 바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작용도 한다. 비인 해수욕장이 퇴화된 꼬리뼈에 방울을 달아준다. 또는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다에서 방울 소리가 난다는 표현은 그런 의미망을 형성한다. 퇴화된 꼬리뼈란 기억 속에 갇힌 과거의 추억일 것이고 방울소리는 그것을 자꾸 의식선상에 떠오르게 하는 바다의 작용일 것이다.
이 시가 그려 보여주고 있는 과거의 추억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적인 사춘기 시절에 얽힌 이야기다. 3연에서 5연까지의 내용은 이런 고백적 진술을 이미지 속에 감추고 있다. 자꾸 말하고 싶은 화자의 의식이 잡힌다. 이 때 잘못하면 상투적인 서술적 진술로 흘러서 시적 긴장감을 해칠 위험이 있다. 그런데 이 시는 감각적인 이미지와 지시적인 언어가 적당히 조화를 이루면서 꽤 감동적으로 전달된다. 사춘기 소녀의 막연한 기대와 황홀감에 젖어 들뜨는 심리 변화과정, 그리고 상처 받고 절망하는 그 시절의 상반된 의식이 감각화된 언어 속에 용해되어 경이감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러나 시가 지나치게 감각화되면 경박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은 언어에 대한 자각이 우선되어야 한다. 언어의 효능에 대한 자각 없이 훌륭한 예술의 시는 창조되지 않는다. 예술이 표현이라는 고유영역을 고집하는 한 이 명제는 절대 진리다.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도 언어의 창조기능을 살리지 못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시적 감동도 결국 언어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존재의 집을 짓는 사람이라고 했을 때 역시 언어의 기능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시인은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기 위하여 언어를 새롭게 갈고 닦아야 한다. 언어에 윤활유를 부어야 하고 오랜 세월 동안 묻은 관념의 때를 벗기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랬을 때 비로소 시는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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