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시의 언어에 대하여
강사/윤재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카는 시의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했다. 모든 존재가 언어에 의하여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존재의미를 갖게 된다는 뜻이다. 언어로 이름지어지기 이전의 존재는 이미 존재로서의 가치가 없다. 아니 존재의미가 드러나지 아니한 상태인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언어는 존재를 밝히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힘을 빌려서 존재를 인식한다. 존재가 가지고 있는 외연뿐만 아니라 그 본질까지도 인식한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언어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시는 언어를 재료로 하는 예술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는 존재 인식의 세계를 그 영역 안에 끌어들이게 된다. 혹자들은 시가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이런 입장에서 시인은 존재에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자로서 절대 권능을 갖는다. 시인은 한 편의 시로서 그가 인식한 존재의미를 드러내 보여주어야 한다. 그 인식이 얼마나 새로우며 깊이 있는가에 따라 시의 수준도 결정된다.
그러나 시는 언어예술로서 미학적 토대 위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시의 언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일상적 언어와 다르다는 자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특히 시가 예술의 영역에 있음을 고집하고자할 때 더욱 그렇다. 언어가 가지고 있는 실용적 기능, 즉 사전적 의미인 개념 전달의 기능만으로는 미학적 진실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존재의 시적 인식에도 방해가 된다. 시는 실재적인 것만을 지시하는 설명적 언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비실재적 세계를 가시화할 수 있는 함축적인 언어를 요구한다.
시에서 이미지가 중요시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지화된 언어는 시를 살아 있는 예술로 느끼게 하는 힘이 있다. 시인이 존재를 어떤 언어로 인식하느냐 하는 것도 이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존재를 개념으로 인식하느냐 이미지로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시와 철학을 구별하는 기준이 된다. 존재의 철학적 인식과 미학적 인식의 경계가 여기에 있다. 시인이 시에서 관념적 세계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이유도 시를 예술의 영역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기성의 관념의 때가 묻은 언어를 시인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이 상상력의 새로운 눈으로 존재를 인식하게 되고 시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내의 얼굴을 모른다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느린 발자국 소리 시멘트 바닥을 울린다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
그리고 파수병의 섬엄한 총검도
그 소리만은 어쩌지 못한다.
어쩌지 못하는 그 소리는 겨울의 소리
천지가 골수까지 얼어붙는 소리
별빛이 얼음에 박히는 소리
사람들아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아는가
머리를 깎이운 복면의 삼손이
오늘밤도 그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 들린다
--------이형기의 <복면의 삼손> 전문
이 시는 제목부터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시 대상을 뛰어넘고 있다. 여기서 복면한 삼손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변형된 의미, 또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창조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복면한 삼손이 시인의 독특한 안목으로 새롭게 인식한 겨울의 소리에 대한 비유적 이미지란 것을 알 수 있다. 겨울의 소리를 삼손의 이미지로 유추할 수 있기까지 시인은 존재에 대한 끊임없는 명명자로서의 탐구가 있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탐구는 과학적 개념 추구를 뜻하지 않는다. 시인은 직관으로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야 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드러내야 한다.
그러면 겨울의 소리와 복면한 삼손이 시안에서 같은 의미관계로 동거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 근거의 설득력 여부가 시의 성패를 가름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겨울의 소리에 대한 존재인식이 얼마만큼의 울림으로 시적 전달력을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게 된다.
이 시에서 겨울의 소리는 진종일 죽은 듯 기척이 없다가 밤중이면 뚜벅뚜벅 찾아오는데, 두꺼운 벽 굵은 쇠창살로도 가둘 수 없고 파수병의 삼엄한 총검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천지를 골수까지 얼어붙게 하고 별빛이 얼음에 박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추위의 위력을 실감하게 하는 표현이다. 이쯤되면 겨울을 세기의 역사 삼손에 비유하는 이유도 납득이 된다.
그런데 이 시는 겨울의 위력적 이미지만을 표출하지 않는다. 시인의 상상력은 빙하시대에 떼죽음을 한 공룡의 무덤을 겨울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떠올림으로써 시적 인식의 폭을 확장한다. 보이지 않는 실체이면서 위력적 존재이기에 삼손으로 비유되는 겨울, 그 겨울의 향방을 상상하게 한다. 여기에 동화적 상상력이 개입하여 미학적 구조를 형성한다. 겨울의 움직임을 복면한 삼손이 무덤을 찾아가는 둔중한 발자국 소리로 형상화하여 상상력의 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 시가 미학적 구조 위에 있다는 것은 관념 진술의 언어가 거의 없고 시적 대사을 이미지화하는 구상적 언어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데서 찾아진다. 그리고 시 전체가 내용상 기승전결의 극적 구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시를 구성하는 각 개의 이미지들이 하나의 주 심상을 중심으로 의미의 연결고리를 가지면서 긴밀한 내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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