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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사랑시에서 중층 구조의 시까지 / 강인한

by 솔 체 2014. 10. 10.

'사랑시'에서 중층 구조의 시까지
- 방법론으로서의 형식과 내용에 대하여

강인한


이십여 년 전에 어느 신문사의 입사 시험에 "당신이 아는 우리 나라 시인의 시 한 편을 외워 쓰시오."라는 문제가 출제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90 퍼센트 이상의 수험생들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택하여 썼다고 한다. 적어도 한국 지성의 엘리트로 자처하고자 하는 그 수험생들이 완전히 이해하고 외우는 시 한 편이 고작 그것이라는 데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현대 사회는 보다 과학화되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인간의 정신적 창조 활동도 반드시 그에 비례하여 발전되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이론일 것이다.
우리의 현대시는 많이 발전해왔다. 아직도 수십 년 전의 눈물 젖은 감상을 요구하는 시 독자가 의외로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시인 김소월은 한 사람으로서 족한 것이지 두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예술이란 독창적인 것이라야 하기 때문에, 예술로서의 시는 빵 공장에서 빵을 구워내듯 한 사람이 비슷한 시를 여러 편 쓰는 일은 무의미하다. 또한 한 시인이 똑같은 시구를 여기저기 다른 작품에다 똑같이 구사한다면 그것은 자기 작품을 스스로 표절하는 행위밖에 되지 않는다.
시인은 부단히 새로운 형식과 새로운 주제를 추구한다. 따라서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 양복과 와이셔츠를 입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며 사색할 줄 아는 현대인이 지금도 장작불을 지펴서 지은 밥을 먹고, 갓을 쓰고 다니는 생활 방식을 강제하는 것은 난센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21세기에 살고 있으면서 19세기의 사고방식을 굳이 고집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1. 노래하는 시와 생각하는 시
시는 존재한다. 이 말은 시가 관념의 설명이 아니란 뜻으로 쓰인 말이다. 한국 시의 많은 독자가 아직도 낡은 세기의 안개 속을 눈물로 헤매고 있음은 대단히 불행한 사실이다. 그래서 과거의 노래하는 시에서 읽고 생각하는 시로 바뀐 데 대하여도 많은 사람들은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여왔었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 김소월의 '가는 길'에서

그리움, 한숨, 눈물의 정감은 달콤하기까지 하다. 가장 인간적인 정감이라기보다 이 한의 가락은 보편화된 한국인의 정감이다. 이것이 직감적으로 젊은 감성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정서가 어찌 다만 구슬픈 사랑과 한의 가락에만 국한되고 말 것인가.
7·5조의 이 같은 원초적이고 동물적인 감정을 배설하는 것만이 시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노래하는 시에서 읽고 생각하는 시로 바뀐 것은 대단한 혁명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포탄(砲彈)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船窓)으로
눈썹까지 부풀어오른 수평(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함뿍 내려앉아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정지용의 '해협(海峽)'에서

이 작품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눈물이나 애타는 하소연이 아니다. 하나의 제시된 언어의 회화를 보게 되는 것이다. 포탄으로 뚫은 듯 둥근 선창 사이로 보이는 부푼 수평선. 여기서 보여지는 아름다움에는 노래하는 시에서 일찍이 읽을 수 없는 미적 감동이 있다.
30년대의 '시문학' 동인들의 공적은 실로 우리 시문학사에 불멸의 금자탑으로 남아 있다. 비록 인간성의 결핍과 기교주의라는 비난을 면하지 못할지라도 시가 지향하는 새로운 길을 터 준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는 허무맹랑한 관념을 보다 치밀한 이미지로 대신한 그것은 일종의 모험 내지는 과거의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부정 정신이 빚어낸 소산이었다. 여기서 싹튼 우리의 주지주의(主知主義) 시는 실로 가열한 창조 정신으로 더욱더 다져져 갔다. 이른바 영미(英美)의 주지주의 이론의 유입이 우리 한국의 시를 현대시로 변모시킨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지난 세기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나머지 그에 분연히 반기를 들고 나선 이미지즘의 기수 에즈라 파운드의 유명한 '지하철 정거장에서'라는 시는 주지주의 곧 이미지즘이 무엇인가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해 준다.

군중들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의 꽃잎들.

단 두 줄의 이 시가 세계 시단에 던져준 그 파문은 컸다. 한 시대의 새로운 사조를 수립한 탁월한 천재의 통찰력은 침체하고 무기력한 낭만주의를 지난 세기의 어둠 속으로 깊이깊이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파운드는 파리의 '지하철 정거장에서' 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군중들 사이에서 지하철 차창 안에 뚜렷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얼굴들의 섬광을, 컴컴하고 축축한 정거장을 배경으로 피어난 꽃잎에 비유하여 형상화하였다. 이 시에 쓰인 꽃잎의 영상은 과거 낭만주의 시인들이 사용한 사랑의 장식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다. 만일 현대시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제거해버린다면 결국 시 자체의 존재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그가 제시한 이미지즘의 대원칙을 살펴보기로 한다.
① 주관적인 것이든 객관적인 것이든 사물을 직접적으로 취급할 것, ②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말 것, ③ 리듬에 관해서는 음악적 언어를 늘어놓아서 작시(作詩)할 것이지, 박자에 맞추어 작시하지 말 것 등이다.
또한 파운드는 조작적인 수사(修辭)와 유창한 시어에서 벗어나 표현의 제일 조건으로 간결·정확을 내세웠는데 "진부한 용어, 판에 박힌 문구, 상투적인 신문(新聞) 용어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런 데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쓰는 것에 주의를 집중한 결과 얻어지는 정확성에 의해서이다. 첫째도 객관성, 둘째도 객관성 …. 불분명한 형용사, 테니슨 조(調)의 수사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시에 이미지가 동원된 만큼 시는 독자에게 지적인 부담을 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냐 하면 이미지는 비유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며, 비유란 지적 연상작용을 필수로 하기 때문이다.

2. 시의 평면성과 진술성
우리 시에서 현대성을 부여받은 주지주의 시에서 결함으로 지적된 것은 메마른 감성이었다. 이것을 극복하고 나선 것이 청록파(靑鹿派)의 시였다. 이들의 시에서는 지나간 낭만주의의 무절제한 '눈물'을 어느 정도 배제하면서 새로운 휴머니티와 자연을 융합한 소위 한국의 멋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미지스트들이 지나치게 집착하던 회화성(繪畵性)에 윤기 있는 음악을 가미하고 있음을 조지훈의 시 '낙화(落花)'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歸蜀道)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이 시에서 자칫 우리가 놓치기 쉬운 것은 시간의 형상화다. 귀촉도라는 새는 초저녁부터 울기 시작하여 밤이 깊어갈수록 그 울음이 더욱 처연해진다. 그 새 울음이 슬며시 사라짐과 동시에 별빛도 희미해지면서 새벽이 온다.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는 것은 귀촉도 뒤로 먼 산이 다가서는 공간의 이미지가 아니라 시간의 이미지다. 즉 새 울음소리가 사라지면서 점점 날이 밝아와서 산의 형상이 어둠 속에서 다가서듯 차츰 뚜렷한 모습을 띠게 된다는 표현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시를 가령 하나의 산문처럼 한 줄로 이어 쓰게 되면 그것은 색채도 없는, 가락을 지닌 평범한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이러한 평면성(平面性)은 줄곧 의식되지 못한 채 우리 시는 생명파(生命派)로 발전하고 있었다. 청마(靑馬)의 경우 그것은 감히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진술성(陳述性)을 띠고 있는데, 예술에 철학을 배합한 그 솜씨는 가히 당대의 일품이었다.

나의 지식(知識)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生命)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 '생명(生命)의 서(書)'에서

독한 회의(懷疑)의 가혹한 채찍은 거의 절창이다시피 그의 시 편편에서 드러나고 있다. 자기 스스로에게 가하는 이 형벌은 다분히 개인적 역사의식의 몸부림이라고 보아 틀림없다. 그리하여 사회적 현실과 보다 밀착하여 예술성을 천착한 시인이라는 의미에서 김수영을 들 수 있다. 오늘에 있어서 그는 거의 신화적인 존재로 군림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적극적인 삶과 냉정한 현실 파악은 시인이라면 항상 기억해야 할 일이다. 그에게 오면 이 진술성은 단순한 생활의 고백 이상인 예술로서 표현되어 나타난다. 그의 시 '병풍'에서 볼지라도

병풍은 무엇에서부터라도 나를 끊어준다
등지고 있는 얼굴이여
죽음에 취한 사람처럼 멋없이 서서
병풍은 무엇을 향하여서도 무관심(無關心)하다
죽음의 전면(全面) 같은 너의 얼굴 위에
용(龍)이 있고 낙일(落日)이 있다.

와 같은 진술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한때 참여와 순수의 논쟁으로 김수영을 간단히 참여 쪽으로 분류해서 매도해버린 것은 크나큰 잘못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시는 곧 정직하고 진실한 삶 그 자체였다.

3. 구조적인 시
지금까지 보아온 시들은 모두 다 구조에 있어서 본다면 평면성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우리의 의식 구조가 대체로 비과학적인 까닭인지는 몰라도 우리 현대시의 대다수가 이러한 평면적인 사고의 범주를 크게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시에서의 음악성을 중시하던 소월 및 그 아류들의 낭만적인 시나, 언어의 회화성을 강조하던 정지용, 김광균 등의 주지시나, 진술의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은 청마 혹은 김수영에게 있어서도 평면성은 똑같이 지적될 수 있는 문제점이다.
소설이나 희곡 등의 산문에서 플롯 ― 구성을 빈번히 지적하는 사람들도 어찌된 일인지 시에 있어서의 플롯은 아예 없는 줄로 알고 있다. 하나의 구조가 한 편의 시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을 보이는 것으로 H. D의 '산신(山神)'이라는 작품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 시는 산의 여신이 처음으로 본 바다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소용돌이쳐라, 바다여―
너의 끝 날카로운 소나무들을 뒤흔들고,
너의 큰 소나무들을
우리의 바위에 뿌려 갈겨라,
너의 푸름을 우리에게 퍼부어라,
너의 전나무 물결로 우리를 뒤덮어라.

이 시에 쓰인 시어에 유의하여 다시 한 번 음미해 본다면 그 속에서 두 개의 '구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큰 소나무'로 비유된 파도와 '전나무 물결'로 비유된 대양의 이미지-바다-와 '소나무, 바위'로 비유된 이미지-산-의 복합 구성은 쉽사리 발견되는 것이다. 이 같은 이중의 구조는 단순한 대조의 기법과는 전혀 다른 것으로 시의 골격을 확실하게 구축해준다. 우리 시에 있어서 구조적인 면을 찾아보기는 대단히 드물고 어렵지만 김종해의 연작시 '항해일지' 중 그 첫 작품 '무인도를 위하여'를 찾을 수 있음은 퍽 다행한 일이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다가 잠시 멈추다.
사라져 가는 것, 멀어져 가는 것, 시들어 가는 것들의 흘러내림
그것들의 부음(訃音) 위에 떠서 노질을 하다.
아아, 부질없구나
그물을 던지고 낚시질하여 날것을 익혀 먹는 일
오늘은 갑판 위에 나와 크게 느끼다.
오늘 하루 집어등(集魚燈)을 끄고 남몰래 눈물짓다.
손이 부르트도록 날마다 을지로에서 노를 젓고 저음이여
수부(水夫)의 청춘을 다 바쳐 찾고자 하는 것
삭풍 아래 떨면서 잠시 청계천 쪽에 정박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무인도여
한 잔의 술잔 속에서도 얼비치는 저 무인도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다.
그러나 눈보라 날리는 엄동 속에서도 나의 배는 가야 한다.
눈을 감고서도 선명히 떠오르는 저 별빛을 향하여
나는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

말할 것도 없이 서울은 바다가 아닌 육지다. 서울살이의 삶이 얼마나 곤고(困苦)한가를 그는 '세파(世波)'라는 단어에서 연상하고 이 시를 썼을는지도 모른다. 육지에서의 삶이 수직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시의 저변을 형성하는 바다의 이미지는 수평적인 것이다. 수직적 삶의 추구가 어렵다고 느낀 시인은 영원한 모성으로서의 수평적 이미지 ―바다에서의 삶을 희구한다. '을지로, 청계천'과 같은 현실의 삶에서 그가 바라보는 수직선상에 빛나는 '별빛'은 아득하기만 하여 '노질을 계속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이 시는 육지와 바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교묘하게 잘 배합되어 있는 이중 구조의 시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제 삼중적(三重的)인 시간성을 입체적으로 구성한 예를 하나 더 들어본다.


흥정을 마친 상선은 돌아오지 않고
남지나해 더운 몸부림이 잠을 쫓는다.
해안을 껌벅이는 새들의 붉은 눈빛이 머루알처럼 익어만 가고

아름드리 기둥을 향하여 벌떼처럼 아이들은 모여들었다.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사탕엿보다 달고 맛난 고함에 묻혀
그는 눈부신 태양을 이마에 댄 채 팔을 벌렸다.
그 가늘고 세찬 팔뚝에 엉겨붙은 평화를 힘껏 포옹했다.
몸채만한 기둥은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조국은 조금씩 그렇게 균열이 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년시절의 대운동회는 즐거웠다.

고원을 치달리는 우람찬 승전고,
뽀얗게 날리는 햇빛가루를 몸에 칠하고 삼림처럼 무성한 고구려의 사내들 ......


삼림처럼 무성한 우계(雨季)가
그의 우러른 눈망울에 어리우고

휴전 고지의 캐터필러 자욱마다 쑥꽃이 피었다 지고
엄청난 사연으로 초병은 울고 있었다.
짐승처럼 울고 있었다.
유성(流星)이 가만가만 어깨에 내려앉는 겨울 하이얀 눈구렁 속에서
조국은 떨고 있었다.
겨냥해야 할 진정한 적(敵)이 없는 지도 위에 엎드려
초병은 비운을 울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무감각한 함성과 파도와 잘못 말려들어간 꿈속에서처럼
그는 비운의 상처를 끄을고 포복해 갔다.
이글대는 태양을 이마에 느끼고, 그가
드디어 곤두서 있는 기둥나무를 끌어안았을 때

내뻗은 두 손은 갑자기 가지를 쳤고, 그리하여
수많은 촉수를 지닌 벌레가 되어 그는
태양을 침몰시키고 있었다.
― 졸시 '대운동회의 만세소리'에서

이 작품은 Ⅰ부터 Ⅷ까지 꽤 긴 편에 속하는 시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의 시간성이 등장한다. 즉 ① 월남전에서 장렬히 전사하는 한 병사의 현재의 시간과 ② 그 병사의 유년시절 대운동회 때의 기둥나무 쓰러뜨리기를 하던 과거의 시간, 그리고 ③ 좀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만주 벌판을 치달리던 고구려 때의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이 세 가지 시간성을 현재의 시간이라는 바탕 위에 의식의 흐름 비슷한 영상적 기법을 시도해본 것이었다. '세기의 어둠을 톱질하는 소리'가 잘 들리는 '여기'는 바로 1960년대 후반의 베트남이다. 우리 한국군이 파병되고 거기에서 용병(傭兵)으로서 피를 흘려야 했던 역사를 나는 가능하면 가장 비정한 시점으로 서술하고 싶었다. 해안선을 날고 있는 전투기, 밀림 속 헬리콥터의 굉음과 포화……. 전쟁 속 한 인간의 죽음이란 기껏 한 마리 갑충보다 초라한 것을, 그 엄청난 비인간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병사의 의식 속에 고향의 흰눈이 내리고, 그 눈보다 흰 북소리와 고함소리와 유년시절 운동회의 아름다운 기억의 편린들. 그것들을 앞서 말한 세 가지의 시간성으로 교차시키며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았던 작품이다. 이 같은 플롯을 마치 한 편의 소설에서와 같은 구성 방법으로 구조화한 것이 이 시였다. 이러한 나의 시도가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의심스럽다.
시는 인간의 진실한 정서와 감정을 언어로써 표현하는 예술이다. 그것은 예나 이제나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인간의 정감이라는 본질은 변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생활 양식이 옛날과 전혀 다르듯이 아직도 소월이나 그 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랑시'의 미망(迷妄)에서 우리는 하루빨리 탈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자의 저급한 입맛에 이끌려가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를 선도해 나가야 하는 게 진정한 시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오늘의 시에 있어서 새로운 형식의 발견과 추구는 부단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현대시에서의 구조적인 면은 새로운 가능성을 지닌, 개척되어 마땅한 방법론(方法論)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2001. 4월 )



* 1978년에 쓴 원고를 다시 고쳐 쓴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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