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시와시학 가을문예 당선작
▶당선 시인 : 이상이, 윤선중,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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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나를 위하여 (외 4편) / 이상이
태양의 둥근 잔에 빨대를 꽂았어요
심장이 진홍으로 타올랐어요
싱그럽게 이글거리는 음, 이 맛
다시는 미숙아를 낳지 않을래요
너무 오래 희망에 갇혀 있었어요
발신분명의 전화는 이제 받지 않아요
풀잎의 날카로운 입술 위
밤새 슬픔을 말아 쥐고 글썽,
웅크린 이슬에게 윙크할래요
썬텐을 하는 구름들의 섹시한 체위들 태양은 여전히 탱글탱글하고요
마음은 아무리 주어도 줄지 않죠
열정은 결코 재가 되지 않죠
날마다 새큼달큼 발랄하고
때마다 화끈하게 끝내주고
발칙하게 이별하고 청순하게 시작할래요
나는 붉게 붉게 리필 되니까
높은 대궁 위에 앉아 뜨거운 표적이 될래요
추락하면 어때요 무럭무럭
날개를 키우면 되죠 번데기잠 달게 자면 되죠
아침이면 또 어화둥둥
지느러미 파닥거리는 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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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눈물 없이 우는 것들은
저렇게 붉다
마른 울음은 뜨거워서
마음을 태우고 데이는 불길이라서
차마 누가 달랠 수도 없어서
내 마지막 기원은
너에게 낙인찍히는 것
돌이킬 수 없는 화상을 입고
너의 한이 되는 것
어둠이 큰 손으로 틀어막을 때까지
너에게 들키고 싶어 활활 우는 저녁
마음을 엎질러놓고
달디단 죄를 저질러놓고
온몸으로 판 벌이는 피울음
영혼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피의 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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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 가방
가족이란 참 질긴 가죽이지
낯 두꺼운 철면피
피 말리는 애간장이지
지리멸렬 박수부대
가족이 모여 가축적인 분위기로
살아가는 산1번지에는
브랜드도 없이 세일도 없이
낮은 단가의 가죽 구두들
끊어지는 건 구두끈이지
닳아지는 건 고무 밑창이지
자행되는 상처와 폭력과 방임들
공공연한 비밀이지
잇대고 꿰맨 우리의 아우라
구멍 난 양말 같은 희망을
집게로 꽉 집어 빨랫줄에 널어놓고
얼기설기 얽혀 사는 다감한 가족
따뜻한 살가죽을 비비며
구겨지고 금이 가도
가죽은 가죽이기를 포기하지 않듯이
가족은 포기를 모르는 법
배추 한 포기란 겹겹 첩첩의
포개고 포갠 한통속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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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달
칼을 간다, 날을 세워야지
두루뭉실 무딘 나를 간다
날마다 간다, 간다, 그믐 쪽으로
구름의 육질을 쓱쓱 베어본다
비계 같은 구름들이 뭉텅뭉텅 잘려나간다
칼을 간다, 새파랗게
마구 휘둘러본다
세상이 그믐 쪽으로 가파른 어깨를 기댄다
손잡이 없는 칼
내 손부터 피걸레가 된다
까무룩 졸도하겠구나
흐흐, 회심의 미소가
사시미 춤사위에 놀아나던 생살점의 횟감들
입 안에 단맛이 돈다
노가리새끼 배를 갈라
창자를 끄집어내는 일 따위
순식간의 놀이다
나는 더욱 얇아졌다
얇아질수록 사냥감이 빛나고……
피 묻은 손을 닦으면
시퍼런 날이 씨익, 웃고 돌아서는
어둠 묽은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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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아, 버, 지
아, 이런, 버러지 같은
아버지는 마침내 앉아버렸네요
늘 꼬부라져 있네요
발육을 멈춘 아버지
욕망이라는 대명사는 이제
폐기되나요 달리지 않네요
한 여자도 사로잡지 못하고
한 가족 배불리지도 못하고
목울대만 울렁거리네요
누구도 두려워 않네요 복종 않네요
서지 않는 아버지
기호만 덜렁덜렁한 아버지
뒷장이 남지 않은 아버지
녹슨 종소리로 늙어서
방향이 캄캄해서 앞뒤 모르는
아버지 눈코 뜰 수 없는
헛기침의 효험도 사라지고
죽은 아버지 그래서 질근질근 씹히는,
씹으면 씹을수록 그리움만 갈기는
참 마려운 아, 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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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 경북 영덕 출생. 대구대 국어교육과 중퇴. 영남대 평생교육원 문예창작반 수료. 현재 여향예원 '시 가꾸는 마을'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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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에 갇힌 코끼리를 본 적 있나요 3 (외 4편) / 윤선중
―골목, 담벼락에 핀 꽃
한길을 피해 숨어있는 골목길
바람도 햇빛도 사람도 구부러져야
제 속내를 보여준다
담장 위
거칠게 바른 병조각들을
햇빛이 빛부시게 꽃피우고 있다
그 꽃과 꽃 사이로
덩굴 이파리들이 낸 길 따라
늘어진 그림자 하나 담벼락을 넘어간다
제 손목 몇 번은 긋고 싶던 사연 감추고
안간힘으로 기어오른 삶이
한순간에 벼랑이 되었다는 김씨
부도처리 된 후
자살처분 된 그의 어린 딸이
두 갈래로 땋은 머리 흔들며 아스라이 지나간다
어스름 내리는 하늘 혈맥이
날카로운 병조각의 꽃에 찔려
핏빛 흥건하다
바람도 찔리는지 소스라치게 놀라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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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제계단이 있는 풍경
고단한 하루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철제계단
녹차 티백을 컵에 담그고 계단 한켠에 걸터앉으면
누군가 서늘한 기운을 전해온다
통통거리기도 하다가
묵직한 신음을 뱉어내기도 하면서
발소리는 몸의 무게가 아닌
걷는 이의 마음의 무게로 생기는 것인가
계단은 그들 마음의 흔들림에 맞춰
몰래 신음 소리를 조절하고 있는지 모른다
철과 철을 맞댄 용접의 흉터로부터
자라고 있는 녹이
페인트를 각질처럼 일으켜 세운다
붉은 생장점을 지닌 채
진폭을 막대그래프로 기록하면서
티백의 실을 들어올리니
따라서 어둠이 계단 아래께로 끌려온다
오늘의 내 무게를 재기 위해 한 칸씩 올라서니
둔, 중, 한 금속음이 마구 출렁거린다
내 마음 속에 깨뜨리지 못한 단단한
동돌이 들어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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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꿈치를 보다
폐수관은
오래 걸어온 발뒤꿈치를 닮았다
녹은 물살의 길 따라 걸어오다가
굳은살로 박히고
담쟁이덩굴의 길 없는 벽을 따라
이제는 흐르지 않는 쉼을 기록한다
목을 빼고 관 속을 응시하는 꽃
그 속을 들여다보기 위해
오랜 시간이 흘렀다
어둠은 젤리처럼 출렁거릴 뿐
어머니의 뒤꿈치,
갈라져 골이 깊은 붉은 속내를 알기까지
왜 그토록 견디지 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바람이 공명음으로 깊은 속말들을 전하려는지
해껏* 우우 거린다
*해껏: 해가 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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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이 있던 자리
새벽에 불을 끄고 누우면 가구들이 툭 소리를 낸다
칠흑이 잠들려는 방안을 흔들어 깨울 때
관절에서 나는 소리일 것이다
설핏 컴퓨터 모니터가 툭 고개를 꺾으면
거실 티브이가 시간을 두고 응답한다
서랍장의 둔탁한 나무결 소리를 듣고 있으면
먼 데 산 속 나무 우지끈 가지 내리며
쉬는 모습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어둠은 서서히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어느 날 가지런히 놓아둔 메모지나 책, 수첩들이
감쪽 사라져 버린 일들이 일어나는 까닭은
참을 수 없는 기다림에 걸음을 옮겼기 때문인가
어둠이 새어나가는 틈새로
옷장의 옻칠이 가뭇없이 떨어져나가는 것은
몸을 일으켰기 때문인가
사라진 것들의 목록을 마디마디 떠올리다 말고
나도 따라 목덜미, 모로 꺾으니
다시 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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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 속에 갇힌 코끼리를 본 적 있나요 1
담벼락 배수관 대신 코를 박고
슬레이트 지붕에 잠들어 있어요
좁은 촛구멍 울컥거리며 제 몸에서
구역질을 해댈 때만 살아있다는 증거지요
그 골목길은 늘 구토물로 파리가 들끓어요
바람이 콧속으로 들락거릴 때는
그 집안 식성들 조금씩 풀어놓으며
그들 근황을 내비춰주지요
그러나 귓속으로 들어오는 건
잘 섞인 반죽처럼 웅웅거리는 소리 뿐
담벼락을 타고 자라는 금이 집 안으로
길을 내고 있어요
코끼리가 몸부림치며 일어나려 하는 걸까요
민들레가 비좁은 틈을 메우며 자라고 있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홀씨들이 허공으로
햇살 따라 부서지겠죠
벼랑을 만들던 아랫집 담벼락이
과자부스러기처럼 바스러지고
지붕은 주저앉아버렸어요
이제 코끼리도 제 뼈를 묻을 그곳으로
길을 떠나겠네요
무덤으로 떠날 수 없는 사람들
바람이 먼지 일으키는 힘 따라 코끼리도 일어서겠죠
재개발 지역
깨진 빈 다라이에 푸지게 담기는
햇살의 시린 풍경도 함께 떠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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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중 / 부산 출생. 2003년 <천안문학> 신인상 수상. 천안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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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 ―인체탐구 1·등 (외 4편) / 이창호
물줄기 내리친다
시퍼렇게 내리친다
그래 그것이 시원해야 더위도 가라앉고
그 판판한 것이 따스워야 배도 부른 법
누구 그것 없이 지내는 이 보았는가 허파나 간이야 더러 잘라내고 무너져도
그것 떼어낸 사람 있지 않느니
혹시 눈 없다고 손가락질 마라
손댈 수 없는, 쉬 무너뜨릴 수 없는
생이 빚어놓은
제 삶의 무게를 층층이 지고 사는 곳
두려움도 그 골로 나오고
시련도 그 살로 비롯되나니
그곳은 한 인물의 위엄이 높이 자리하는 곳
홀연 돌아서는 그의 그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때로 허망한 슬픔이던가
앞은 그저 허식일 수 있으나
뒤는 어떻게 꾸밀 수 없으니
그것은 누구에게나 숨김없는 진실인 것을
그것을 뒤에 짐은 감감한 삶과의 이별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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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라 소년을 위한 발라드-인체 탐구2·살
투탕카멘의 황금마스크 아니어도
파평윤씨집 천년 미라 소년이 누워있다
어디 한번 까딱여 보려무나 네 손가락
어느 세월 후에나 정말 눈 번쩍 치켜뜰까
엄마! 하며 일어나 부를 날 있을까
꽃피어나는 애교 속에 입맞춤과 포옹의 날카롭고 부드러운 감촉, 걷고 뛰며 달리며 팽팽했을 그것, 아니면 소년왕처럼 금은 보석으로 치장하고 온갖 소리, 맛, 향에 취하며 때로 그의 제국을 호령하던 분노의 핏발, 눈빛 험하게 요동쳤을 그것, 사람마다 그것 위해 늘 입 열고 또 세상거울 앞에 단장하나니 그것 있어 세상 모든 목숨들 ‘살다’라고 말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젠 그것 다 어디 두고
한 점 마른 북어로 스러져가는 네 모습인가
소년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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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여, 너와는 영원한 결별이다-인체 탐구6ㆍ눈
-오이디푸스왕은 오늘도 외친다
어둠이여, 네 짙음으로 내 앞을 가려 다오
이 저주스럽고 흉물스런 둥근 태양을
날카로운 것으로 찔러 내던졌어도
너는 독뱀처럼 이리저리 휘둘러보느냐
네가 보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이냐 왕의 옥좌냐 무엇보다 너는 태중에서부터 특출하여 큰 호사 기약하더니 온갖 보호 속에 보배로운 지식 풍족한 즐거움 향유하던 자 사랑으로 웃음짓하고 때로 서러운 별을 우러르던 맑은 영혼의 창, 마음의 통로이었건만 그러나 네가 안내하던 아름다움과 권력의 자리는 심히 헛된 것 음욕이나 욕정으로 영혼을 뒤흔들어 불사르던 어지러운 허깨비 파멸의 탐욕을 폭발시키던 신기루 같은 것 애초에 네가 너의 밝음으로 모든 것의 뒤를 꿰뚫어 보았더라면 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처럼 사람의 앞날을 내다보고 미움과 욕망과 살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을…… 그러니 어느 누구도 세계가 아름답다고 가르치지 마라 빛이 찬란한 세상 있다는 상상 맹인에게 일으키지 마라
오히려 볼 수 없는 몸, 감촉만으로 마음의 빛으로
붉은 장미와 여름, 금관의 가을 볼 수 있으리니
바람과 햇살, 들향기 시냇물소리로 꽃소식 들을 수 있으리니
빛이여 어둠이여, 이제는 나를 놓아 다오
어둠으로 나의 벗이 되게 하고
쓰라린 죄와 벌로 나를 단근질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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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빛나는 거울-인체 탐구4ㆍ얼굴
사랑하기에 하나하나 그려보고
존경하기에 마냥 우러러보는
그것 없이 어찌 당신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요
신화 속 프시케 그 어여쁜 공주도
그의 남편 보고파 그만 촛불 켜들고 말았다는데
음성만으로 만짐만으로 어느 누구인들
사랑할 수 있을까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다고 가르치고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본다고 말들 하지만
그러나 고운 모양도 색깔도 없는 어떤 이를
이 세상 누가 관심 주며 흠모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경영해야 많은 사람 거느릴 수 있다고
화장에 분장에 살과 뼈까지 성형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은 내면에 있다는 말 곧이들리겠나요
그것 상하고 없어지면 껍데기 벗는 것 같다는 말
사실일까요
바람 같은 애증의 칼날, 동정 혹은 경멸의 마음빛이
숨김없이 스쳐 지나는 영혼의 가장 빛나는 거울
아, 당신의 모습 당신으로 인해 슬픈 나에게 보여주세요
보이는 게 거짓이라 해도 덧없는 것이라 해도
나의 애정 나의 자랑 드리올 당신의 참 모습 보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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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자의 노래-인체 탐구3ㆍ발
나는 참으로 비천합니다
집안에서 가장 낮은 행랑채에 거합니다
나는 주인의 명령이 힘들지만 반갑습니다
주인이 말씀하시면 나는 곧 일어나 걷습니다
나의 행동에 주인은 미더워 콧노래를 부르지요
나는 고귀하고 거룩하게 걸음을 옮깁니다
거친 산이나 뜨거운 모래밭 아득히
나는 걷고 걸으며 늘 자취를 남깁니다
나로 인해 새로운 길이 나고 지도가 그려집니다
사람들은 그리로 행진을 계속합니다
나는 때로 눈보라 치는 북극 남극으로
또 우주선 타고 달에도 화성에도 달려갑니다
나는 어떤 주인에게나 순종합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소식도 가져오고 슬픈 소식도 전합니다
스무나믄 나의 뼛조각, 신비로운 나의 운송력
허나 나를 칠십 킬로 화물을 운반하는 짐꾼으로만 여기진 마십시오
밭고랑 위, 무대 위, 혹 그라운드 위 내 주인에겐
눈물의, 열정으로 새긴 최고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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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 전북 정읍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 졸업. 논저 『국어 말실수에 관한 연구』등. 현재 삼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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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
심사위원 : 이승하(시인, 중앙대 교수)ㆍ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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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하고 견고하며 오래 지탱할 수 있는 목소리를 기대하며 - 이승하
예심을 거쳐 올라온 일곱 분 예비시인의 작품을 받아들고 심사에 임하기 전에 크게는 세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신선한가. 신인의 목소리가 전혀 새롭지 않고 립싱크에 가깝거나 모창이라면 시와시학 가을문예의 의미는 퇴색되고 전통을 쌓아나가고 이 계간지의 값어치까지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기성시인의 흉내를 내지 않고 자기만의 시 창작법을 선보인 응모자가 과연 있을까.
얼마나 견고한가. 최근 들어 유행이 되다시피 한 다변과 달변의 시는 예언컨대 생명력이 그다지 길지 않을 것입니다. 치열한 자기 성찰과 절차탁마의 흔적을 보여준 투고작이 과연 있을까.
얼마나 오래 지탱할까. 문예지가 엄청나게 많아진 지금, 사회교육원 시 창작반 같은 데서 1~2년 정도만 공부하면 너나없이 등단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라면 크게 잘못된 일입니다. 등단 이후 꾸준히 활동할 만한 저력을 지닌 이가 과연 투고했을까.
심사 포인트를 이 세 가지에 두고서 읽어보니 자연스럽게 윤선중·이상이·허경삼 세 분으로 압축되었습니다. 투고된 15, 14, 11편의 시는 습작의 연륜이 충분히 느껴지는 작품들이라 우선 신뢰감이 갔습니다.
<벽 속에 갇힌 코끼리를 본 적 있나요> 외 14편의 특징은 생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있는 자의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윤선중 씨는 언어를 아껴야 한다는 시의 기본 정신을 망각하지 않으면서 일상의 기미를 예리하게 관철하여 시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편편의 완성도 유지도 좋지만 약간의 모험심을 발휘하여 일탈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지나친 단정함이 오히려 감점 요인이 되기도 하니, ‘배운’ 시가 아니라 스스로 ‘깨친’ 시를 쓰는 긴 여행에 오를 것을 권유합니다.
<칸나를 위하여> 외 13편의 시를 투고한 이상이 씨는 도발적인 언어 구사와 돌발적인 상상력이 장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새 이런 것은 위 시단에서 낡은 문법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시의 진정성이란 뿌리깊은 나무와도 같아, 얼른 눈에 띄는 것은 아니지만 유행의 바람에 잘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재기발랄한 언어 감각을 잘 살려나가되 ‘재치’의 세계에 머물지 않도록 늘 자신의 이러한 장점과 자신만만함을 경계하면서 시작 활동을 해나간다면 등단자는 많되 신인다운 신인이 부족한 우리 시단에서 확실한 개성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비 그리고 모니터> 외 10편을 투고한 허경삼 씨는 언어를 선별하여 배치하는 능력, 즉 시의 구성 방법을 확실히 알고 있는 분입니다. 편편의 시가 재미도 있고 깊이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흔히 하는 말로 2%가 부족합니다. 집중력이나 끈기가 조금만 더 있으면 등단은 쉬 이뤄질 것입니다. 조금 약한데, 조금 부족한데… 이런 느낌이 들지 않도록만 해주십시오.
당선의 영광을 누리게 된 두 분께는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아깝게 떨어진 허경삼 씨에게는 위로의 악수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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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성과 자기 목소리를 지닌 신인 - 김기택
본선에서 논의한 시는 모두 7편이었다. 그러나 그중 이상이와 윤선중의 시가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했다.
이상이의 시는 이미지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는 점이 장점이다. 그것은 시적 대상이 시인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육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상이씨는 부정적인 정서나 내면적인 상처를 허구적인 상상력으로 변화시켜 즐기는 방법을 어느 정도 터득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종종 보이는 안이하고 장난스러운 어투(“썬탠을 하는 구름들의 섹시한 체위들”, ‘포기(抛棄)’에서 연상된 배추의 ‘포기’ 등)는 시의 진정성을 약화시킴은 물론, 시인의 시에 대한 태도가 치밀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윤선중의 시는 건물, 배수관, 계단과 같은 사물을 동물적, 육체적인 상상력으로 생기 있게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재미있고 구체적인 이미지는 이 시인이 세밀한 대상의 관찰을 통해 자신의 삶을 오랫동안 객관화시키려고 노력한 결과로 얻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끈기 있게 탁마한 듯한 성실한 자세도 이 시인의 작품을 신뢰하게 한다. 그러나 꼭 필요하지 않은 상투적인 문장의 삽입, 관습적인 결말 등에서 보건대, 자기 목소리가 타인의 목소리에 가려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허경삼의 시도 주목할 만 했으나, 그의 시는 경쾌하고 재치 있는 이미지가 시인의 경험과 정서가 힘 있게 실린 것이 아니라 아이디어에 의존한 것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해 선에 들지 못했으며, 김운산의 시 역시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드리며, 선에 들지 못한 분들은 좀 더 분발하여 다음에 좋은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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