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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김경주의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을 읽으며 / 강인한

by 솔 체 2015. 1. 28.

김경주의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을 읽으며
―요령부득과 앰비규이티

강인한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 / 김경주



한번은 쓰다듬고
한번은 쓸려간다

검은 모래해변에 쓸려온 흰 고래

내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지갑엔 고래의 향유가 흘러 있고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표정은 아무도 없는 해변의 녹슨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씹어 먹던 사과의 맛

방 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 주면 그대의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는 고래의 표정으로 숨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 해변에 누워 있는데 내가 지닌 가장 쓸쓸한 지갑에서 부드러운 고래 두 마리 흘러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어떤 적요는
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그 깊은 음모에도 내 입술은 닿아 있어
이번 생은 머리칼을 지갑에 나누어 가지지만
마중 나가는 일에는
질식하지 않기로

해변으로 떠내려온 물색의 별자리가 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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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이 요절했기 때문에 사실 그의 작품들에 바쳐진 비평가들의 헌사는 수작과 함께 태작에도 똑같은 찬양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평자들의 무조건적인 경배가, 편견 없는 독자들의 올바른 감상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고 봅니다.

김경주의 시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서서히 그런 위험 속에 조금씩 함몰돼 가고 있는 조짐이 느껴집니다. 그의 새 시집 『기담』에 대한 평단의 평가를 두고 음미해 볼 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겠지요. 부정적인 의미의 침묵을 힘있는 평자들은 암묵적인 동의라고 치부해버리는 경향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일반 독자들이 상당히 황당한 느낌을 받음에 비추어 볼 때 힘센 평론가들의 편향된 시각은 간극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물론 김경주가 이상(李箱)의 시적 계보를 이어받고 있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합니다. 그렇긴 해도 역시 김경주의 모든 작품이 비평가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을 만한가, 이 부분에 머물러 나는 회의적입니다.

엊그제 daum의 〈시, 사랑에 빠지다〉에 발표된 김경주의 「내 머리카락에 잠든 물결」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daum과 월간 《현대문학》이 공동으로 기획한 이 연재물 가운데 읽을 만한 시들은 대략 열 편에 세 편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도 이 작품은 그 열에 셋으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먼저 제목의 참신성은 높이 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검은 모래해변에 쓸려온 흰 고래"

이 시의 지배적 이미지인 고래. 특히 '흰 고래'는 「백경(白鯨)」이라는 허먼멜빌의 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시인은 검은색과 흰색의 강렬하며 담백한 대비적 색감을 의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닌 가장 오래된 표정은 …… 씹어 먹던 사과의 맛"

물론 시인이 새로운 문법을 창조하는 자라 할지라도, 이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표정이 맛이라니. 이건 비문(非文)이라기보다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지요. 말도 아니라는 겁니다.

"방 안에 누워 그대가 내 머리칼들을 쓸어내려 주면 그대의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마치 해변에 밀려와 누운 착한 고래처럼, 내가 누워 그대의 손길에 머리칼을 맡기면 손으로 쓸어주는 그대의 손가락 사이로 파도 소리가 난다. 이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상상인지요. 대단한 상상력입니다.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은 고래의 표정으로 숨쉬는 법을 처음 배우는 머리카락들"

도대체 이런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요. '나는 그대의 손바닥에 가라앉은 고래의 표정으로 숨쉬는 법을 처음 배운다' 라고 하면 그냥 이해할 만하거든요. 그런데 '나는…… 머리카락들'이라니. 이런 식의 비문(非文)에까지 평자들이 눈 딱 감고 박수쳐 준다면 그런 이들을 경멸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해변에 … 고래 두 마리 흘러나온다 감은 눈이 감은 눈으로 와 비빈다 서로의 해안을 열고 들어가 물거품을 일으킨다"

정말 김경주이기에 가능한, 아름답고 서정적인, 따뜻한 사랑의 이미지!

"어떤 적요는 / 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그 깊은 음모에도 내 입술은 닿아 있어"

적요는 음모를 사랑하고 싶다? 역시 말도 아닌, 요령부득(要領不得)의 언어도단 아닌가요. 그러나 그 뒤에 이어지는 진술은 그럭저럭 긍정적으로 읽을 수 있는 표현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고 싶다,' 라는 말은 그 앞에 어떤 주체가 놓여져야 할 것인가를. 그것은 반드시 1인칭 주어를 필요로 하는 것이지요. '내가(혹은 우리가) ∼ 고 싶다,' 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굳이 '적요'를 3인칭으로 간주할지라도 3인칭의 '그는 ∼ 고 싶다, '는 문장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혹시 시인은 '어떤 적요의 상태에 빠지게 되면 누군가의 음모조차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이런 식으로 얼버무린 것일까요. 시의 문장도 문법에 맞아야 함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요령부득의 문장, 또는 비문(非文)을 시가 지니는 앰비규이티(ambiguity)라고 너그럽게 포용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떤 적요는 / 누군가의 음모마저도 사랑하고 싶다"
드라마를 촬영할 때에 배우가 이런 식의 "@&*%" 로 대사를 얼버무리는 발음을 하면 연출자는 참지 못하고 NG를 선언하고 말겠지요.

널리 알려진 하나의 예를 들어봅니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다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타여
보내고 그리난 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잘 알다시피 황진이의 시조입니다. "아, 나의 일(내가 저지른 일)이여. 그리워할 줄을 몰랐던가. (가지말고 여기) 있으라고 하였으면 가랴마는 제(임)가 굳이 보내고 나서 그리워하는 정은 나도 모르겠구나." 여기서 '제 구타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장으로 마쳐지는 문장 의미로만 보자면 "내가 만류하면 제(임)가 끝끝내 뿌리치고 가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뜻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제 구타여'가 다음의 종장과도 연결된다는 점에 착안해서 읽으면 달라집니다. "내가 왜 굳이 임을 보내고 그리워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자탄하는 심정의 발로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의 '제 구타여'는 모호한 사용법을 가졌다 할 것이며(시인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노린 것입니다) 이게 바로 시의 앰비규이티, 애매모호성인 것입니다.

"마중 나가는 일에는/ 질식하지 않기로"

'질식한다'는 건 타자의 힘에 의해, 혹은 어떤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서 숨막힌다는 의미를 지니는 말.
그런데' ~하지 않겠다'고 자기 의지를 피력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마중 나가는 것과 질식하다라는 의미가 연결될 수나 있는 것일는지. 산소용접을 한다 해도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억지 연결인 듯합니다.

"해변으로 떠내려온 물색의 별자리가 휘고 있다"

해변에 밀려왔다가 다시 곡선을 그으며 물러나는 물색의 물결. 어디선가 흘러 떠내려온 고래의 이미지. 이것은 첫 연과의 연관성을 생각한 아름다운 마무리라고 하겠지요.

김경주의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구사하였으며 신비로운 사랑의 행위를 노래한 시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면 이 시가 과연 그의 다른 우수한 시가 보여준 시적 성취와 같은 수준이겠는가, 이 점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일 것입니다. 단지 김경주의 시이니까, 무조건 그 아래에 꽃다발을 바쳐야 하는 건 아닐 겁니다.


빛깔도 매우 선명하고 향기가 은은하며 맛있는 사과가 한 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사과는 몇 군데 큼직한 상처가 나서 썩어들어 가고 있습니다. 자 그럼 이 사과를 진열대의 맨 앞에 내놓고 손님들에게 자신 있게 선전할 수 있을까요? 아, 미안합니다. 이 사과는 썩은 부분만 도려내고 보면 정말 맛있는 사과랍니다. 그럼 아마 행인들은 모두다 등돌려 버리고 말겠지요.
그렇지 않은 일군의 고객도 있긴 있습니다. 그들은 사과의 썩은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아보지 않으려 들며, 예전에 맛본 몇 개의 사과 맛을 상기하여 무조건 사과장수 편을 드는 바람잡이들입니다.

( 2009. 2.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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