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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이영광의 시 「春畵」 를 읽고 / 정은기

by 솔 체 2015. 1. 30.

이영광의 시 「春畵」 를 읽고 / 정은기

 

 

春畵

이영광



이 늙은이가 이렇게까지 불행해졌던 적은 없었다
그림쟁이, 옛날의 그는 잠든 고목을 발기시켜
하늘을 찌를 듯한 근력 끝에 회춘 꽃구름을 점묘하고
봄 천지를 외설로 적시고도 비린내 내친 적 없었지만,
지금은 덜덜거리고 쿵쾅거리는 개발 지구에 늙어서 나타났다
그의 주제는 사람 사랑 짐승 사랑, 꽃 벌 나비의 사랑
누리가 달아오르고 엉겨 붙고 젖어 흐르면 붓을 쉬고
神韻을 드리워 놓고 길 잃은 사랑들 찾아다니곤 했지만
천지사방에서 봄을 불붙이던 그도 이젠 외로운 퇴역전선,
폐자재 콘크리트 더미 망연한 공터에 앉아 있다
너무나 많은 봄이 살해당한 곳에서
직각으로 끊어진 벼랑과 내장을 끌고 다니는 기슭을
파 뒤집고 깎고 뭉개는 기계들의 전성시절을 본다
이 독무대에 색정을 불어넣어야 한다 녹색이
더 깊은 바탕색임을 덜덜덜, 입증해야 한다
찢긴 화폭, 그가 공사판을 앙상한 가슴 높이에 맨다
그의 손이 우선 갈필을 휘둘러 흙을 깔고 철근, 돌무더기
스티로폼 조각들을 만지고 훔친다 멍 풀듯 개고 이긴다
부지런한 마른 손이 누비면서 벽돌들은 풀어져
흙에 파이고 섞여든다 그의 보이지 않는 붓이 한나절
하늘의 비를 불러오자, 젖다가 데워져서 끈적대는
타액들이, 용접하고 착색하며 공터를 흘러갔다 한 사나흘
그의 또 안 보이는 붓이 해를 불러 쬐고 다시 비 뿌리는 동안
일손 놓고 마르다 젖는 포크레인들 컨테이너 막사에서
불그레 먼 산 보는 인부들, 이유 없이 후끈 달아 있다
그가 녹색을 찾아내는 순간이다 별안간 뒤섞이다
불끈거리다 꿰뚫고 내밀며 초경 같은 혈색이 돈다
象外의 이물들이 화폭에 젖어든다 번지면서 자라는 풀빛
잡동사니를 그냥 잡동사니라 치고 푸르게 어우러지는 것들
쑥부쟁이 민들레 냉이꽃들 향긋한 회음부로 섰다 난리다
배후엔 원근 무시하고 산벚꽃, 목련 병풍을 벌써 두어 획
그어두었다 그의 세필이 먼 하늘, 땅 밑에서 벌 나비들을
불러온다 점, 점, 점, 날아내린다 노랑나비 팔랑나비
호랑나비들, 붕붕거리고 끈적거리는 화염이 주둥이에
꽁무니에 몰려 있다 창피도 피임도 모르는 헐떡임이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음란하다 공사는 시들해져
젊은 축은 술집으로 늙은 축은 아예 벌개서 집으로 갔나보다
사랑은 만지고 핥고 녹다가 끝내는 사라져버리는 것
춘화란 만지고 핥고 녹여버리는 정욕의 역동적 정지
그러므로, 이 그림은 꿈틀대며 노래하는 동영상이다
흥분하여 아득해지고 제자리에서 치솟고 사방으로 전파하는 것
갔다간 어느 새 花冠들의 발돋움에 맴돌아 다시 떨어지는 것
하릴없이 조금은 비릿하다 바탕색이려니 한다
비 뿌리다 갠 오후, 산벚나무 그늘이 자꾸 그림자를 늘여와
땀 씻어준다 丹書를 새기면서 덩굴손이 올라간 뒤
지친 꿀벌들이 돌에 누워 자고 노랑나비 꽃 속에 숨고
콘크리트 검은 먹빛이 들썩인다 자꾸 욱신거리나 보다
아무리 요란한 섹스로도 이 폐허 다 가릴 순 없었나 보다
흙인가 천인가 녹색인가, 필력보다 화구가 미흡했다
살려내지 못한 것들은 희미한 여백에 여여히 묻어두마
덧대고 꿰맨 글썽이는 누더기다 참 낡은 천의무봉이다
나는 철없는 노골을 가려 주기 위해 그가 데려온 어스름에,
노쇠한 그의 팔뚝에 자꾸 눈이 간다 쓰리다 그러나 안다
이 폐허는 이렇게 또 한 번 이러한 자연이 되었지만
이 늙은이가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했던 적은 없었다


― <현대시학>,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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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를 견디는 법 / 정은기



이영광의 「春畵」는 폐허에 대한 기록이다. 특히 기력을 모두 소진한 노인과 녹색의 자연이 모두 파헤쳐진 개발 지구에 대한 기록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처음부터 위태로움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보통 폐허는 죽음의 흔적으로 나타나거나 곧 닥쳐올 죽음에 대한 불길한 징후로 표상되는데, 이때 문학은 폐허를 마주하고 그로부터 기인하는 상처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관습적인 정서를 거느리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폐허를 마주하고 있는 시적 화자는 노골적으로 쓸쓸함을 자아내거나 ‘문득’ 스쳐가는 깨달음을 통해 상처의 의미를 전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자칫 훼손된 자연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생태주의의 도식적인 구조를 답습할 뻔한 위험성에서 시인 특유의 장엄하면서도 유려한 문체와 복합적인 구성을 통해 능숙하게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훼손된 자연이라는 특정 공간이 유발하는 문명사적인 경고의 메시지보다, 그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과정으로서 서사의 방법론적 전개가 작품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다.
먼저 이 작품은 제대로 조직된 스토리텔링의 이야기 구조로 시작된다. “이 늙은이가 이렇게까지 불행해졌던 적은 없었다”라는 이 작품의 첫 행은 친절한 안내자 역할보다 호기심을 유발하는 장치에 더 가깝다. 비교적 주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상황을 제시한 후, 서서히 결론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늙은이가 왜 이렇게까지 불행해졌는가’에 대해서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의문의 격차를 조금씩 줄여가며 화자는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유인한다. 이렇게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진입하는 동안 사람들은 몰입하고 공감하며, 정화된다. 물론 이 작품은 “그의 주제는 사람 사랑 짐승 사랑, 꽃 벌 나비의 사랑”이나 “이 독무대에 색정을 불어넣어야 한다 녹색이/ 더 깊은 바탕색임을 덜덜덜, 입증해야 한다”는 구절에서처럼 단도직입적이지만, 우리는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유려한 문체와 폐허의 공간을 다시 소생시키려는 에로스적 상상력에 눈길을 빼앗겨, 호흡이 흐트러진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을 수 없다.
특히 한때는 ‘잠든 고목을 발기’시켜 ‘회춘 꽃구름을 점묘’하고 ‘천지사방에서 봄을 불붙이던’ 노인의 쓸쓸한 모습이 ‘덜덜거리고 쿵쾅거리는 개발 지구’의 모습과 중첩 되면서 이 작품은 입체적 구도를 띄게 된다. 여기에서 ‘직각으로 끊어진 벼랑과 내장을 끌고 다니는 기슭을 파 뒤집고 깎고 뭉개는 기계들의 전성시절’을 바라보기만 하는 노인의 형상은 범부의 그것이 아니다. 노인은 ‘보이지 않는 붓’으로 ‘하늘의 비를 불러오’고, 한 사나흘 ‘해를 불러 쬐고 다시 비’를 뿌린다. 마치 기우제를 관장하는 제사장의 모습으로 시적 공간을 신화적 공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노인은 녹색을 찾아낸다. 이때 노인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일종의 주술적 행위에 가까우며, 이러한 공간에서의 시간은 언제나 현재이며 영원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쯤에서 이러한 제의적인 상상력은 제목 「春畵」가 암시하고 있는 에로스적인 축제의 장으로 전환된다. 자연의 만상들은 서로 뒤엉켜 헐떡거리며 화염을 토하고, 폐허의 공간에 터질듯한 심장박동의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포크레인이며 공사장의 인부들 할 것 없이 모두들 후끈 달아 있다. 사실 에로스는 결핍을 채우고 풍요로움으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서의 폐허의 공간 역시 뜨겁게 달아올라 ‘배후엔 원근을 무시하고 산벚꽃, 목련’이 가득 들어차듯 생명력으로 풍요로워진다. 춘화란 바로 이렇게 뒤엉킨 상태, ‘만지고 핥고 녹여버리는 정욕의 역동적 정지’의 상태라고 시적화자는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물론 이 작품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 작품에서 노인이 그림을 그린 과정은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실제 사건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야기는 폐허를 마주하고 있는 시적 화자에 의해 현상되는 의식적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문체는 이와 같은 시적 화자의 의도를 보다 분명하게 해준다. 시각적으로만 보더라도 55행에 달하는 비교적 긴 형태의 시가 호흡의 어긋남 없이 유지될 수 있음은 시인의 독특한 신화적 상상력과 화법의 구술성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관찰에 기댄 시적 화자의 의도와 전지적 위치에서 서술되는 노인의 의도가 교차되면서 진술된다거나, 시어의 조직적 배치에 의한 율격 형성보다 도치에 의한 긴장의 조성, 다음 행으로 의미를 걸쳐두는 식의 행갈이를 의도적으로 구사하면서 ‘끈적대는/ 타액들이, 용접하고 착색하며 공터를 흘러’가듯 시의 내적 형식과 외적 구성이 잘 된 반죽처럼 긴밀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아무리 요란한 섹스로도 이 폐허’를 모두 녹색으로 채울 수 없었다. 노인은 ‘살려내지 못한 것들을 그냥 희미한 여백에 여여히 묻어’둔다. 그런데 이렇게 소생된 자연은 ‘덧대고 꿰맨 글썽이는 누더기’이면서 ‘천의무봉’이다. 결국 완벽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미완으로 남겨두어야 하는 안타까움은 이 시가 획득하고 있는 미학적 성과가 아닐까. 바로 ‘철없는 노골을 가려’주고 있는 어스름의 무게가 힘겹게 느껴지는 이유다.


-<현대시l> 2009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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