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대경의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평설 / 정은기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서대경
내 할머니의 영혼은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 내가 혼자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후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있노라면 그것은 쥐가 돌아다닐 때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 사실 할머니의 영혼은 쥐를 닮긴 했다. 사람들은 왠지 영혼이라 하면 밝거나 투명한 어떤 빛의 덩어리 같은 걸 떠올리는 것 같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할머니의 영혼은 검고 앙상하고 털이 나 있다. 피터 아저씨는 그건 그냥 쥐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할머니가 누운 침대 밑으로 그것이 나오는 걸 나는 보았다.
그것은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쥐가 아니다. 더구나 할머니가 숨을 거둘 때, 할머니의 눈동자가 천천히 뒤로, 얼굴의 내부로, 돌아갈 때, 나는 할머니의 죽음이 일으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무언가가 뒷걸음치는 소리, 무언가 하얀… 그것은 할머니의 내부에서 섬광처럼 하얗게 빛나다가 곧 어두워졌고, 그것은 곧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나는 듣고 있었다. 하지만 피터 아저씨는 말없이 시트를 끌어올려 할머니의 얼굴을 덮어버렸다.
창밖으로 서커스 공연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온다. 골목을 달려 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는 탁자 위에 놓인 구겨진 지폐 몇 장을 바라본다. 피터 아저씨는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피터 아저씨는 가끔씩 날 때리지만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건 아니다. 아저씨는 술에 취해 하얗게 분칠한 내 얼굴을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그러고는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다. 북소리가 멀어져간다. 문 밖 계단에서 소리가 나는 것 같다. 나는 문을 열어본다. 계단은 어둠에 잠겨 있다. 어둠의 가장자리가 희게 빛난다.
그는 어제 저녁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가파른 계단의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 피터 아저씨? 하고 물었지만 나는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어두워져 가는 백야의 하늘 속에 잠겨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의 눈은 푸르렀다. 그것이 나를 향했을 때 나는 알 수 있었다. 자고 갈 거예요? 하고 물었지만 아니란 걸 알았다. 저녁의 열기가 잘디잔 물방울이 되어 계단 위를 뿌옇게 뒤덮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는 이해했다. 그는 꼽추 광대였지만 그는 아름다웠다. 나는 알았다. 나는 창녀지만, 내가 창녀가 아니란 걸 그가 이해한 것처럼. 안나― 안나― 안나― 그가 내게 말했다. 내 가슴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그는 안나― 안나― 안나― 하고 속삭였다.
할머니의 영혼은 비밀스러운 고독에 잠겨 홀로 돌아다닌다. 할머니는 나를 보러 내려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방식이란 걸 안다. 나는 창가에 팔꿈치를 괴고 어둑어둑해지는 백야의 길거리를 내려다본다. 그가 다시 나를 찾아와줄까? 세상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사람이란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내가 왜 이럴까? 오늘따라 내 방은 왜 이리도 끝없이 슬퍼 보일까? 오늘밤에도 그는 광대 모자를 쓰고 눈가에 붉은 물감을 칠한 채 어느 어두운 밤거리의 축축한 열기 속을 걷고 있을 것이다. 커다란 북을 둥둥 울리며, 안나― 안나― 안나― 속으로 속삭이면서. 나도 눈을 감고 안나― 안나― 내가 모르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 다락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물건들이 쓰러지는 소리. 다락방 창문이 깨지는 소리. 깨진 틈으로 백야의 열기가 밀려드는 소리. 할머니의 영혼이 헐떡이는 소리. 안나― 안나― 안나― 할머니의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
― 《현대시》 2009년 2월호
▲ 서대경 / 2004년 《시와 세계》로 등단. '인스턴트' 동인.
---------------------------------------------------------------------------------------------------
기억의 변주와 현실의 재구성 / 정은기
인간이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 깊숙한 곳에서 현실 너머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방식은 문학의 주된 기능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특히 시가 지향하는 지점은 다른 여타의 장르에 비해 시, 공간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독자들의 기대를 쉽게 뛰어넘는다. 그곳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 보다 이상적이며 동일성으로 이루어진 완전한 세계로 표상되기도 한다. 현실 너머에 있으면서 더 현실적인 리얼리티를 지니고 있는 세계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간의 인식은 대상을 명중시키기 위해 부단히도 애를 써왔지만 어떤 철학적 사유도 과녁의 한가운데를 꿰뚫지 못했다. ‘이편’과 ‘저편’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 미세한 균열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어느 편에도 존재하지 못했던 것들이 꿈과 무의식, 환상이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시적 지향점은 다양한 의미를 생산, 영역을 확장해 왔다. 이처럼 인식의 사각지대를 관대하게 껴안으며 대상을 포위해나가는 방식 역시 문학의 주된 기능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서대경 시인의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은 지금 여기를 벗어나 있는 ‘저편’까지의 아득한 거리와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수한 존재들에 대한 문학적 대응방식의 일례라 하겠다.
이 작품은 ‘내 할머니의 영혼은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라는 첫 구절로 시작된다. 비교적 긴 산문시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해당 작품에서 유독 첫 구절이 의미심장하게 읽혀지는 이유는 ‘영혼’과 ‘다락방’이 가지고 있는 함의의 진폭이 크기 때문이다. 다락방이 시적 화자의 기억이 꿈과 무의식 혹은 환상을 통해 재현되는 공간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할머니의 영혼’이 ‘다락방에 머물고 있다’라는 진술과 ‘쥐가 돌아다닐 때처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낸다’라는 진술이 ‘할머니의 영혼은 쥐를 닮긴 했다’라는 진술로 옮겨 다니는 동안 이미지들은 환유적으로 배열된다. 또한 ‘할머니의 영혼은 검고 앙상하고 털이 나 있다’라고 말하다가도 ‘피터 아저씨’를 등장시켜 ‘그건 그냥 쥐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쥐가 아니다.’ 무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던 기억들이 순간적으로 출몰하며 나타나는 이미지들일 수도 있고, 시적 화자가 미처 기억하지 못하고 있던 무의식의 파편들일 수도 있다. 기억은 ‘다락방’이라는 공간에서 변주되고 의미가 확장되어 실제보다 더 풍요로운 의미의 공간으로 현실을 재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기억은 지난 순간의 이미지들이 현재의 인식에 관여하는 수단이라 할 수 있다. 실제의 현실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이며 추상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기억은 단속적이며 모든 현상을 개별적 단위로 변형시켜 분간할 수 있는 사건의 형태로 만든다. 때문에 기억은 일종의 추상화된 과거이며, 현실에서 지각한 정서와 다른 양상으로 과거를 보존하고 있다. 이때 기억은 실제 현실보다 한층 더 새로운 의미들로 보강된다.
특히 이 작품에서는 할머니의 죽음과 이에 근접해 있는 이미지들을 동원하여 시 속의 시, 공간을 보다 풍요롭게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지금 여기의 형식을 지니고 있는 할머니의 죽음이 현실 ‘저편’이라는 무중력의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가게 된다. 또한 제목의 ‘세인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지명은 이후 작품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작품의 시, 공간적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기보다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장치로 판단된다. 죽음이라는 어휘가 지니고 있는 익숙한 정서들이 생경한 모습으로 치환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에 집중함으로써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기억의 전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렇게 의미의 확장이 일어나는 과정이 청각적 이미지들의 적절한 배치로 인하여 보다 입체적인 형상을 띄고 있다는 점이다. 할머니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얼굴의 내부에서 죽음이 일으키는 소리를 들었다고 말하는 대목이나, 그것이 ‘무언가 뒷걸음질치는 소리’였다고 기억하는 대목은 기억 속에서의 평면적인 죽음을 입체적으로 형상화시키는 부분이다. ‘창밖으로 서커스 공연을 알리는 북소리’와 ‘골목을 달려나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안나― 안나― 안나―’라는 환청이 시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메아리로 울리기도 한다. 화자는 ‘나도 눈을 감고 안나― 안나― 안나― 내가 모르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본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는데, 기억에 의존한 이러한 인식의 방식은 주체의 통제 밖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때문에 시적 화자의 기억은 매우 소란스러우며 돌발적인 양상을 보인다. ‘물건들이 쓰러지는 소리. 다락방 창문이 깨지는 소리. 깨진 틈으로 백야의 열기가 밀려드는 소리. 할머니의 영혼이 헐떡이는 소리. 안나― 안나― 안나― 할머니의 영혼이 속삭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어지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소리들은 기억이 변주되는 동안 화자의 의식 속에서 들끓었을 소리들이며 이를 통해 재현되는 현실은 보다 풍부한 의미를 지니는 세계로 형상화된다. 「세인트 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이 현실 너머의 문법으로 쓰여지고 있지만 현실에 대한 강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음이 확인되는 부분이다.
'문학 참고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고재종의 「목련의 꿈」을 읽고 / 나희덕 (0) | 2015.02.05 |
|---|---|
| 정소슬의 「꺾인 꽃」을 읽고 / 진 란 (0) | 2015.02.04 |
| 신춘문예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이 승 하 (0) | 2015.02.03 |
| 조연호의 '천문(天文)' 감상 / 김명원 (0) | 2015.02.03 |
| 긴 분량의 시, 산문시와 자폐적인 시 쓰기를 벗어나라 (0) | 2015.02.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