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철의 「말머리성운」평설 / 김병호
말머리성운 — 회색병동 1
이인철
색색의 알약들
입에 털어 넣고
군의관 앞에서 군번을 외우는
몽롱한 초저녁
쇠창살 사이로
밤마다
허공은 창문처럼 열려
말 모양의 별자리 뜨고
우리는 밤마다 붉은보라색 꿈을 꾼다
광주상무대 610동 정신병원에서
대가리 없는 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말머리성운 속으로 도망친다
거기서 숨바꼭질을 한다
뿌연 성운 속에서 무엇으로든 몸을 바꿀 수 있다
번지는 마리화나 냄새
우리는 싱싱한 별을 뜯어먹는 망아지들이 된다
새벽녘
대가리가 없는 말들이 끄는 마차는
어김없이 광주로 되돌아온다
또 다시 군번을 외우는 아침
우리는 말 울음소리로 운다
― <현대시>, 2009.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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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환각과 망각 / 김병호
이인철의 시는 대체로 강퍅한 현실에 맞서 고통스럽게 황폐해져가는 병든 영혼을 그리거나 아름다운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원형적 고향을 복원해내는 데 그 중심을 두고 있다. 그의 시는 사막 한복판에 서 있는 무사처럼 현실과 대결하거나 혹은 흑백의 풍경사진처럼 삶이 지닌 근원적 여운을 지켜내고자 한다. 이처럼 그의 시세계는 서정의 양극단에 위치한 두 계열체의 측면을 동시에 함유하는 있는데, 오늘 읽는 「말머리성운」이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이번 작품의 경우, 억압된 역사가 지배하는 피폐한 현실의 단면과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한 인간의 내면을 통해 서정과 환상의 이질적 경계를 넘나들면서 그 미학적 깊이를 확보하는 한편, 두 계열체의 질적 변용을 통해 새로운 시적 특질을 생성해내려고 한다는 점에서 주목되기도 한다.
시 읽기에 있어 정답은 없다. 가장 보편적 독법이 가장 답에 가까운 근사치를 담보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간혹 의도적 오독이 오히려 시의 본질과 핵심을 꿰뚫는 경우도 많다. 이번 작품의 경우 시를 단순히 평면적 텍스트로 읽어내지 않고, 오히려 행간을 뛰어넘으며 그 텍스트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재구성하는 고유한 독법을 통해 이인철의 작품을 가로질러 읽지 않고, 천천히 맴돌며 촘촘히 살펴 읽고자 한다.
먼저 작품의 배경은 군 정신병원이다. 마리화나와 같은 색색의 알약으로 밤을 버티는 환자가 시적 화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가 군인이라는 사실과 그곳이 광주라는 사실은 독해에 있어 역사적인 거시적 관점을 요구한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읽었다. “대가리 없는 말들이 끄는 마차를 타고” 도망쳤던 화자가 새벽녘 “광주로 되돌아”왔기 때문이다. 시인이 굳이 그들의 귀환점을 상무대의 정신병원이 아니라 “광주”라고 지정한 저의에서 그 혐의를 찾았다. 게다가 이미 광주에서 장성으로 이전한 상무대를 여전히 광주상무대라 칭하며 애써 광주의 이미지로 읽히려는 시인의 의도 역시 이 작품의 불순한 오독을 유인하는 주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이러한 독법을 통해 얻어지는 이 시의 가치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오늘, 1980년 광주에 대한 새로운 문학적 응전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자칫 치명적 오독으로 치부될 이러한 독법은, 지배체제의 이념에 대항했던 대타적 이념이나 현실의 실천적 변혁의 차원이 아니라 가해자이면서 희생양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제3의 영역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기인한다.
시의 전반에 드러나 있는 절망감이나 무력감은 이전 여타의 시들이 행한 광주에 대한 시적 언술과 근본적 차이를 보여준다. 시인은 광주를 과거의 역사적 상징으로 읽거나 어두운 시대의 한때 기억의 편린으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다. 또한 교묘한 형태로 자신의 모습을 은폐시킨 채 우리의 삶을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있는 타락한 자본을 읽어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도구적 이성의 광기에 의해 저질러진 비극의 지점, 특히 가해자이면서 희생자인 회색지대의 인물들이 지닌 그늘의 세목들을 짚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원래 암흑성운은 별과 별 사이에 있는 가스와 먼지 덩어리이다. 이것들은 스스로 빛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뒤에서 오는 별빛을 부분적으로 흡수하거나 산란 또는 편광시켜 별빛을 흐릿하게 하거나 완전히 가리는 천막과 같은 역할을 한다. 특히 ‘말머리성운’은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암흑성운인데, 지구로부터 약 1500광년쯤 떨어진 오리온 별자리에서 사냥꾼의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있는 먼지구름으로 그 검은 실루엣이 마치 말의 머리 모양과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암흑성운, 말머리성운을 자신의 은신처로 이용한다. 시인은 이 어두운 “성운 속에서 무엇으로든 몸을 바꿀 수 있다”. 그리고 시인은 그곳에서 “싱싱한 별을 뜯어먹는 망아지들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색색의 알약 혹은 마리화나가 지난 환각의 힘이다. 시인을 이렇게 고통의 극단에까지 내몬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역사에서 비극은 수없이 되풀이되고, 그 비극의 역사에서 비롯된 고통과 슬픔은 다시 망각의 힘으로 자신을 확대재생산하며 더 큰 아픔과 고통으로 이어가고자 한다. 이때 예술가의 책무는 우리에게 이러한 비극이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것이며, 그 일깨움은 고통의 승화에 의해 가능하다. 마치 연극을 하는 배우가 저주받은 운명을 의식하며 두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 역을 연기할 때, 그 아픔을 얼굴에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배우 스스로 눈이 찔리는 아픔의 정도를 체화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곧 슬픔이 내재된 고통을 예술가 혹은 시인이 스스로 일체화할 때, 암흑성운 저편의 별빛을 향한 노정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환각 상태에서 매일 밤, 붉은보라색 꿈을 꾸는 정신병원의 환자들. 환각의 어둠 속에서는 무엇이나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군번을 외며, 말 울음소리로 울어야 하는 그들은 역사의 희생양이다. 목소리를 잃고, 몸과 정신을 잃고, 꿈마저 빼앗긴 그들은 현실의 억압을 상징하는 군의관 앞에서도 여전히 몽롱한 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이렇게 시인은 광주의 아픔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거나 혹은 소재적 차원에서 추모하지 않는다. 우리가 애써 지나쳤거나 간과했던 제3의 영역에 놓인 그늘에 대해 날카롭게 일러주는 것이다. 인간의 망각 속도는 사회의 발전 속도와 다르지 않게 파시스트적이다. 이 파시스트적인 무서운 가속도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이 속도에 편승하지 못하면 “광주상무대 610동 정신병원” 환자들처럼 낙오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암흑성운 속으로 도피를 꿈꾸게 되는 것이다. 무서운 망각의 가속도의 흐름을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역사에 대한 반역행위일 것이다.
그러나 그릇된 역사에 대한 반역은, 애써 망각을 거부하고 새롭게 기억하며, 오히려 망각의 그늘 밑에 놓인 세목들을 짚어보는 일은 당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책임일 것이다. 시인 이인철은 암흑성운의 어둠 속에서 지워진 별빛을 되살려 머리만 남은 채로 없어진 몸을 되찾고, 제대로 된 울음을 찾는 일 또한 시인의 몫임을 잘 알고 보인다. 그리고 시인의 시가 빛나는 까닭과 시의 오독이 불쾌하지 않는 까닭 역시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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