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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천 개의 진실로 열리는 천 개의 페르소나들

by 솔 체 2015. 8. 29.

천 개의 진실로 열리는 천 개의 페르소나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리뷰 / 이 찬

 

    * -이운진, 「나의 탄생」

      * -김충규, 「허공의 문장」

      * - 정용화, 「사소한 기별」

      * - 김다호, 「잠 속의 잠」

      * - 정수경, 「달의 파일」

 

 

   “시는 기술적 제작의 산물이다”라는 명제는 ‘현대시’를 그 이전의 시들과 구별케 하는 가장 유력한 기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이른바 ‘자연발생적 감정의 유로’라는 술어로 표상되어왔던 낭만주의 시관을 소박한 것으로 만든다. 저 명제 속에는 우주의 모든 만물들이 서로를 마주보면서 함께 울린다고 전제했던 ‘유비적 세계상analogical vision’이 이미 흘러가버린 지난날에 불과하다는 확신이 스며있다. 그렇다. 세계와 시인과 시작품은 더 이상 서로가 서로를 비추는 형이상학의 거울을 겹쳐 세우지 않는다. ‘아날로지’는 이미 깨어졌으며, 충만한 의미로 감싸여진 ‘원환적 총체성’의 세계는 그 어디에도 실재하지 않는다. 이제 세계와 시인과 시작품은 각자 자신들의 권리장전을 들고 나온다. 그리하여 그들 각자는 자신들의 고유한 존재론적 가치를 외치기 시작한다. 세계와 시인이 서로 다른 존재자들로 찢겨져나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시작품 안쪽에 기거하는 화자와 그 바깥의 시인 역시 하나의 동일한 인격체로 환원될 수 없다. ‘현대시’의 세계에서 그 둘은 이미 분열되어 있는 서로 다른 존재자들일 뿐이다.

   융(C. G. Jung)은 “페르소나는 해당자의 개성과의 관련에서는 부차적인 현실, 즉 단순한 타헙물과 같은 것이며 이 타협에서는 흔히 당사자보다 다른 사람들이 더 많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페르소나는 가상이며, 2차원적인 현실이다”(「자아와 무의식의 관계」, ?인격과 전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페르소나’라는 연극배우의 소품은 시작품 내부에 놓여있는 화자의 얼굴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달리 말해, 화자는 시작품이라는 다른 무대에서 매번 바꿔 쓰는 시인의 ‘가면이자 또 다른 ‘페르소나persona’인지도 모른다. 아니다. 저 논법은 단순한 이분법의 함정을 피해가기 어렵다. 시인은 곧 기원의 자리를 틀어쥐고 있는 원형적 본질이며, 화자는 어떤 단 한 순간에 현현할 수 있는 한낱 외양적 현상에 불과하다는 저 오래된 ‘본질/현상’의 형이상학적 이분법 말이다. 오히려 우리들이 나날의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일상인들의 얼굴이야말로 숱한 사회적 관계들에 의해 치장되고 윤색된 페르소나가 아닌가? 그리하여 시작품에 새겨진 화자의 일그러진 여러 얼굴들이야말로 바로 저 페르소나를 벗겨낸 우리의 맨얼굴에 가까운 것은 아닌가? 아니, 저기 저 깊고 깊은 곳을 파들어 가면 우리들 모두는 자신의 참된 얼굴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처음에 나는 먼지였고

      먼지였을 때

      나를 부풀린 건

      엄마의 사랑이었을까요

      피가 덥고 뼈가 단단한 사내의 청춘이었을까요

 

      어떤 운명도 결정되지 않았을 그때

      결코 고요하지 않던 물의 방에서

      여자가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행복해했나요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웃음소리는 맑았던가요

      왜 나는 슬픔으로만 키가 크고 살이 찌나요

      당신들의 긴 하룻밤의 혼돈이 멈춰지질 않아요

 

      아마도 나는

      그녀 속에 있던 남성이었고

      그녀 속에 있던 여성이었나봐요

      모유를 흘릴 때조차 사향 냄새를 찾아내는

      불온과 야생의 유전자

      맹수의 척추를 세운 마음으로 사랑의 순례를 해요

      두 겹 세 겹 가면을 쓰고

       눈물의 배후를 찾아 다녀요

 

      그러나 이제라도 심장의 무게를 달아

      비밀과 죄의 저울을 지울 수 있다면

      나는 다시 불안 없는 영혼으로 돌아가

      천일 동안 마늘을 먹을까봐요

      그러면 나는 또 무엇이 될까요

                                              -이운진, 「나의 탄생」전문

 

   이운진의 「나의 탄생」에 나타난 화자는 어떤 ‘지향성 Intention’에 사로잡혀 있다. 그것은 “두 겹 세 겹 가면을 쓰고/눈물의 배후를 찾아다녀요”라는 문양에서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다. 이 문양은 “나”를 이루었던 태초의 순수한 시간을 되짚어가려는 화자의 심리적 벡터를 드러낸다. 1연에 나타난 “처음에 나는 먼지였고/먼지였을 때”라는 이미지와 “불온과 야생의 유전자”라는 3연의 이미지는 서로를 비춰주면서 자연스럽게 서로를 끌어당긴다. 그것들은 모두 기원에 대한 동경과 열망으로 기득 찬 낭만주의의 모티프로 둘러싸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유전자”라는 시어는 절정의 감각을 이룬다. “피”를 타고 이어져 내려온 이른바 원형의 기억과 집단적 무의식, 그리고 분석심리학의 세계. 바로 그곳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그녀 속에 있던 남성이었고/그녀 속에 있던 여성이었나봐요”라는 구절 역시 분석심리학에서 말하는 ‘아니마anima/아니무스animus’의 도식을 변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저 도식이 반드시 시인의 원형적 자아를 나타내는 것이며, 작품 내부에서 말하고 있는 유일한 주체인 화자는 시인의 ‘페르소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시작품 외부에 거주하는 경험 세계 속의 시인이야말로 사회적 관계의 집합적 배치들이 빚어낸 하나의 ‘페르소나’이며, 매번 시쓰기가 주어지는 순간들마다 다르게 마주치게 되는 실존의 맨얼굴들, 곧 화자들야말로 시인 자신의 본래적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원형은 저토록 멀고 먼 기원의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어지는 욕망과 힘의 집합적 배치 속에서 매번 다르게 탄생하는 바로 그것이라고. 이 맥락을 시인 이운진은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새긴다. “나는 다시 불안 없는 영혼으로 돌아가/천일 동안 마늘을 먹을까봐요/그러면 나는 또 무엇이 될까요”

 

      슬슬 몰려오는 어둠이

      그을린 그것이

      지옥을 품고 온 듯한 그것이 숲을 슬슬 차지할 때

      물기 없는 노래를 부르는 새를 숲이 버리고

      버림받은 새도 숲을 버리고

 

      허공에 난 미세한 구멍들-,

      빛이 빠져나가려고 안달하는 미궁,

      세상을 버린 이가 저승에 드는지

      지상의 어느 한 지점에서 잠시 흰 빛이 한 뭉치 쑥 올라와

      구멍을 통과해 나가는 소리

 

      구름들-, 허공의 불편한 근육들이 긴장하고 있다

      새들 -, 허공의 문장이 되지 못한 글자들이 수북수북 날아간다

     

      땅에 태胎를 몰래 묻는 어린 어미가

      잠시 허리를 펴고 고개를 들어 구름에 눈망울을 씻는다

      가느다란 빛으로 세상에 왔던 아기는 죽어

      허공의 구멍 속으로 빠져나가고

      아기가 한때 웅크렸던 어린 어미의 자궁엔

      이제 그을음이 가득하다

 

      물컹한 것, 젖이 불어서

      수건으로 젖을 짜내는 어린 어미가

      밤이면 홀로 나와 허공을 올려다본다

      그녀가 기다리는 건 새 아기가 아니라

      구멍 속으로 빠져나간 죽은 아기의 그 숨결

      천국에서 잘 지냈다 다시 오렴

 

      자궁 속의 그을음을 씻자고 밤이면 홀로 나와

      허공을 보며 기도하는 어린 어미의 어깨 위로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빛이 사부작 내려앉을 때

      새들이 허공의 문장을 이루며 완벽한 모양으로 날아간다

                                              -김충규, 「허공의 문장」전문

 

   김충규의 「허공의 문장」의 화자는 좀처럼 그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자기 내면에 깃들어있는 감정의 얼룩들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를 채우고 있는 “새”와 “숲”과 “구름”이 이루어놓는 풍경들의 펼쳐짐에 집중력을 투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대개 1인칭의 내면을 표상하는 도구로 활용되는 인칭대명사 “나”는 단 한 번도 표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화자가 배경으로 물러나고, 사물들과 그 풍경들이 전경으로 밀려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화자는 사물에 대한 어떤 느낌과 가치 판단도 소유하지 않은 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선을 통해 자신이 감지한 어떤 감각적 사건들을 그대로 시의 표면에 옮겨놓고 있는 것일까? 따라서 이 시의 화자는 단지 관조자의 위치에 머물러있는 객관적 카메라 같은 것일까? 흔히 ‘한정된 사물의 관조’(T. E. Hulm), 또는 ‘사생적 소박성’(김춘수) 등과 같은 말들로 표상되어 온 ‘이미지즘imagism'의 시작법 원리를 이 작품이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듯하나, 여기서도 사물과 사물이 얼굴이 서로 부딪치고, 풍경과 풍경이 서로를 맞세우면서 신비스런 분위기와 이상한 느낌들이 생겨나는 것 또한 틀림없는 일이다.

   “상을 버린 이가 저승에 드는지”, “가느다란 빛으로 세상에 왔던 아기는 죽어”, “아기가 한때 웅크렸던 어린 어미의 자궁엔”, “구멍 속으로 빠져나간 죽은 아기의 그 숨결/천국에서 잘 지냈다 다시 오렴”, “허공을 보며 기도하는 어린 어미의 어깨 위로” 등과 같은 문양들은 이 작품이 단지 객관적 풍경 묘사에만 주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예시한다. 그것은 풍경의 객관적 묘사와 재현을 넘어서버리는 다른 의미소들을 거느리고 있기 때문이다. 저 의미소들은 자연의 사물들을 바라보는 시선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죽음과 허무, 현세와 내세라는 인간적 전율과 공포를 그 자체로 환기시킨다. 따라서 이 작품의 보이지 않는 배경에서 시인이 화자에게 씌운 ‘페르소나’는 객관적 카메라가 아니다. 단지 카메라의 눈인 것처럼 말하고 있을 뿐이다. 마치 카메라의 눈인 것처럼 위장하는 잘 보이지 않는 주체, 바로 그것이 이 작품을 이끌고 나아가는 ‘페르소나’이다.

 

    서둘러 오던 버스가 저녁으로 스며드는 시간 너라는 시공 속에서 나를 잊은 뒤 사소한 기별에도 속수무책 요약되는 일 처음 은 아니었다 어쩌다 오지 않는 것들을 따라 여기까지 왔는지, 시작과 끝 사이에 망설이는 나는 여전히 부재중이다

 

     내가 늘 소망하는 것은 누군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줄조차 모르는 미래의 조각들 꽃이 피어도 오지 않는 봄의 비밀, 오래도록 미루어온 해명을 하기 위해 어두워질 때마다 나는 모서리를 하나씩 잃어간다

 

      주머니에서 문득 잃어버렸던 너를 꺼낸다. 다정함을 잃은 구름이 흘러가다 삭제되는 아득함, 그러나 바람이 아니고서야 어찌 찢어진 날개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계절을 건너는 동안, 빗속에서도 젖지 않는 것은 웃음뿐,

 

      밤이 낮을 덮어 감싼다 어둠의 형식은 길고 단조로워서 열정도 번민도 다만 온순해지고 너무 늦어버린 것인지 떠나고 없는 너의 무관심이 오래 나를 응시하는 오늘, 이제 너는 종결어미 하나로 지워지는 문장이다

                                                       - 정용화, 「사소한 기별」전문

 

   정용화의 「사소한 기별」에서 언표행위의 주체는 “나”이며, 그 언표의 주체 역시 “나”이다. 그러나 저 두 갈래의 “나”는 단일한 하나의 인격체로 수렴되지 않는다. “시작과 끝 사이에서 망설이는 나는 여전히 부재중이다”는 구절처럼,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말하고 있는 “나”가 아닌 “주머니에서 문득 잃어버렸던 너”, 곧 타자이다. 따라서 이상한 모순 형용의 관계들로 짜여진 다음과 같은 문장이 가능할지 모른다. “나” 안에는 “나”가 너무 많이 있고, “나” 바깥에 또한 너무 많은 “나”가 있다. “오래도록 미루어온 해명을 하기 위해 어두워질 때마다 나는 모서리를 하나씩 잃어간다”는 구절은 그러므로 우리 삶을 이렇게 저렇게 얽어매놓는 사회적인 여러 ‘선분들segments’에 따라 우리들의 얼굴선 또한 매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두려운 진실을 현시한다. “누군가 잊어버리고 잃어버린 줄조차 모르는” 다른 “미래의 조각들”을 “내가 늘 소망함”에도 불구하고, “열정도 번민도 다만 온순해질” 수밖에 없는, 그리하여 결국 내 속에 있는 무수한 타자들이 “종결어미 하나로 지워지는 문장”처럼 처리될 수밖에 없다는 그 진실을.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거죽 아래서 ‘페르소나’의 탄생을 암시한다. “종결어미 하나로 지워지는 문장”인 “너”란 결국 “내”가 사유하지 못한 “나”,이거나 “나” 안에서 망각되고 폐기처분된 “나”의 ‘분신들double’이며, ‘페르소나’란 그 모든 “나”의 분신들을 지우고서 표면에 솟아오른 “나”의 유일한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기별」은 ‘서정적 자아’라는 말로 호명되어 온 선험적이고 본래적인 시인의 기원을 은밀하게 숨겨놓지 않는다. 또한 이 작품의 페르소나가 우리 눈앞에다 현시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자기동일적인 ‘영혼의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너라는 시공 속에서 나를 잊은 뒤 사소한 기별에도 속수무책 요약되는 일”이란 문양에 새겨진 것처럼, “내”가 ‘나 아닌 것not-I’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서글픈 운명의 선이며 그것이 거느리고 다닐 수밖에 없는 가공할만한 진실이다. 어쩌면 시인 정용화의 말처럼, 저 진실의 “어둠”과 “빗속”에서도 “젖지 않는 것은 웃음뿐”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떠나고 없는 너의 무관심이 오래 나를 응시하는 오늘”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모든 순간들을 ‘생생한 현재’로 전화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매개체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차단기 앞에 서면 텅 빈 가슴속에서 기적 소리 들린다

      저무는 노래들 바람에 휩싸여 레일위로 눕고

      빛인 듯 바람인 듯 흘러가는 철길을 멍하니 바라볼 뿐

 

      눈을 감으면 장자의 껍질을 깨고 나와 날갯짓 하는

      나비들 까마득 하늘을 뒤덮는데

      거친 매듭을 닮은 나비 떼들 속에서 허둥대는 사이

      가물가물 춘몽을 향해 흘러가는 기차

 

      잠자고 싶을 때 잠들 수 없고

      낮에도 밤에도 깊은 잠에 빠지지 못하는 것은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가득한 내 몸 때문일 테지만

      철길 위로 나비되어 퍼붓는 함박눈 보고 있으면

      더욱 간절한 잠, 잠, 잠

 

      꼬여진 매듭을 더듬을수록 잠은 잠 속으로 숨어버리고

      차단기 너머 스멀대는 잠의 소리를 깨물고 있으면

      밤은 이승도 저승도 아닌 채 깊어간다

 

      내 머릿속에는

      벌겋게 녹슨 채 열릴 줄 모르는 차단기가 있다

                                                    - 김다호, 「잠 속의 잠」전문

 

   김다호의 「잠속의 잠」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는 인간의 내면 속의 내면, 내면 속의 외부, 아니 내면 안에 있는 내면의 타자라는 라이트모티프를 “잠”의 이미지로 축조하고 있다. 그 이미지는 ?장자莊子?에 나타난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이미지와 다시 결합되기도 하고, “철길” 안과 밖을 구획하는 “차단기”의 이미지로 연결되기도 한다. 또한 “잠들고 싶을 때 잠들 수 없다는” 불면증의 이미지로도 표현된다. 따라서 저 “잠”이라는 이미지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실제적인 “잠”만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차라리 현대인들이 스스로의 내면을 합리적으로 통어해야만 한다는 자기 규율의 원리를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현대세계가 거느릴 수밖에 없는 합리성의 공화국은 이 작품에서 “풀리지 않는 매듭으로 가득한 내 몸”이란 이미지로 새겨지며, 그 외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내면의 다른 얼굴들, 곧 사유되지 않은 것, 내면의 타자성은 “꼬여진 매듭은 더듬을수록 잠은 잠 속으로 숨어버리고”라는 은폐와 매장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작품의 페르소나는 “내 머리 속에는 녹슨 채 열릴 줄 모르는 차단기가 있다”라는 문양으로 표현된 ‘정신분열적 주체schizophrenic subject’ 의 이미지를 얻는다. 어쩌면 저 ‘정신분열적 주체’는 현대세계라는 태반이 낳을 수밖에 없는 ‘이성적 주체’의 쌍생아이자 그것 내부에 이미 똬리를 틀고 앉아있는 “풀리지 않는 매듭”, 곧 분신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 작품의 페르소나는 바로 분열된 주체와 마주칠 때에서야 비로소 열리는 진리 주체의 얼굴인지도 모른다.

 

      붉은 바늘이 혀에 돋았다

      간혹 입 밖으로 새어나오는 질식한 말

      머리카락은 뿌리를 내려 상처의 변방을 키운다

       나무 아래 의자에서 엉킨 생각을 한 올 한 올 푼다

      풀려나온 상처들, 경쟁하듯 생각을 뜯어먹는다

       의자는 손을 뻗어 나무를 기어오른다

      생각의 깊이만큼 의자는 초록을 입는다

      어제 떨어진 빗방울은 기억의 모서리에서 빛난다

      초록을 빠져나온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든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이 빗어 넘긴다

      손가락 사이 뿌리 뽑힌 상처의 시간들 줄줄이 딸려 나온다

      상처의 시간이 한 장 한 장 나뭇잎을 넘긴다

      벌레 먹은 나뭇잎에 가려진

      열사흘 감상적인 달이 상처의 이마를 쓰다듬는다

      가지 끝 위태롭게 매달린 수컷 붉은등거미는

      종족을 위한 살덩이의 질감에 몰두하다

      잠시 후 달의 몸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질문, 꽃피는 세상 바깥쪽으로 던지는 질문이 점점 붉어진다

      질식한 대화 속 나는, 나를 벗어 의자에 앉힌다

      혓바늘 돋은 달이 부풀고 있다

                                                       - 정수경, 「달의 파일」전문

 

   정수경의 「달의 파일」에도 역시 “질식한 대화 속 나는, 나를 벗어 의자에 앉힌다”는 자기 분열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시간의 흐름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기에 앞서 살펴본 시편들과는 다른 의미의 맥락을 구성한다. 그것은 예컨대 “풀려나온 상처들, 경쟁하듯 생각을 뜯어먹는다”, “손가락 사이 뿌리 뽑힌 상처의 시간들 줄줄이 딸려 나온다/상처의 시간이 한 장 한 장 나뭇잎을 넘긴다” 등과 같은 문양들로 표현된, 과거의 어떤 장면들로 슬픔과 분노의 정념이 반복적으로 달라붙는 바로 저 ‘원한resentiment’이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솟아올랐다가 다른 것에 몰두할 때 쉽게 사라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경쟁하듯 생각을 뜯어먹는” 것인 동시에, “줄줄이 딸려나오는 상처의 시간들”이라는 끈질긴 기억의 연쇄를 항상 제 몸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다. “상처의 시간이 한 장 한 장 나뭇잎을 넘긴다”는 이미지처럼, 그것은 좀처럼 망각되지 않은 특정한 시공간의 사건들이며, 과거라는 시간에 붙들린 퇴행의 감정이다.

   「달의 파일」의 페르소나는 바로 저 원한에 사로잡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자이며, “열사흘 감상적인 달이 상처의 이마를 쓰다듬는다”는 말로 표현된 자기 치유를 간절하게 희구하는 자이다. 따라서 저 ‘원한’의 시간을 ‘운명애’로 뒤바꾸려고 애쓰는 자이며, 자기 분열을 정직하게 목도하는 자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의 페르소나는 우리들의 경험적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실제의 자아보다도 훨씬 더 진지한 자아이며, 시인 정수경의 본래적 자아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침내 이 작품을 통해 이렇게 외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적 경험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숱한 사회적 페르소나들이야말로 우리 자신의 실존적 주체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야말로 가면들에 불과한 것이며, 차라리 시적 페르소나, 또는 예술가의 가면이란 천개의 진실을 향해 열리는 천 개의 진정한 주체를 도래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2010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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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찬 /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시적 에피파니를 위하여: 이장욱론」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저서로 '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 '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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