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철의 「소주」감상 / 권순진, 강성철
소주
최영철
나는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장르에 왔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
지금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
어디 불같은 바람만으로 되는 것이냐고
함부로 내지른 토악질로 여기까지 오려고
차가운 것을 버리고 뜨거운 것을 버렸다
물방울 하나 남아 속살 환히 비친다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 같은 주름이 있다
오래 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이
남은 저를 다 마셔 달라고 기다린다.
— 시집 『야성은 빛나다』(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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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시인의 시를 보면 눈에 보이는 사물 하나하나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솜씨에 탄복한다. 때로는 의료용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또 때로는 작업용 목장갑을 끼고 능숙하게 해체된 물건 그 틈바구니에 그만의 언어를 쏙쏙 밀어 넣어가며 새롭게 구축한 사물의 이미지가 마치 색다른 언어 조형예술을 보는 듯하다.
그의 시 ‘연장론’에서처럼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플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우리 가까이에서 수시로 영혼을 분탕질 해대는 소주를 원심분리 하였다. 소주 한잔에 담긴 추억으로부터 자기반성과 갱신의 의지로 나아가며 긴장을 획득한다.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과 불순의 시간을 견딘 폐허 같은 주름. 당시의 현실대응이 현재의 자아관점에서는 차갑고 뜨거운 모든 것을 버렸다 했지만 미처 다 버리지 못해 남겨진 그 투명한 것은 저를 다 마셔달라고 기다린다.
시인은 아직도 80년대의 사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소주로 시대의 아픔을 다 이겨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도 공영방송에서는 100분 토론이 벌어지고 시사토크쇼가 진행된다. 그리고 도처에서 묵은 장르의 소주 판이 펼쳐지고 잔은 말갛게 비워지고 있다. 미합중국 대통령 조지부시도 카트리나와 이라크 전으로 끊었던 술을 다시 마셨다던가. 또 건수가 있는 목요일이다.
— 권순진〈권순진의 맛있게 읽는 시〉 대구일보 2008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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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동시대를 살아온 최영철 시인. 유신말기와 전두환 군사정권시대를 청춘으로 보낸 이들에게 ‘소주’는 술이 아니라 시대의 아픔을 견뎌내는 ‘명의 화타’의 ‘명약’이었다.
황동규가 『삼남에 내리는 눈』에서 소주를 마시며 「기항지에서」를 썼고, 감태준이 포장마차에서 소주를 마시며 「흔들릴 때 마다 한 잔」을 썼으며, 어느 가난한 성악가 지망생이 소주를 마시면서 「명태」를 불렀고, 학생 운동하다가 군대로 끌려가는 친구를 위로하며 소주잔을 기울였으며, 이념서클 친구들과 소주를 마시며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부르다가 사복경찰에게 주의받곤 하던 그 시절. 그야말로 소주는 이러한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주하면 떠오르는 진로眞露-참 ‘진’ 이슬 ‘로’, 다시 말해서 아침햇살이 막 피어나는 참이슬!
시인은 “어느새 이슬처럼 차고 뜨거운 장르에 왔다”는데, 다름 아닌 소주와 함께 보낸 지난 시절을 반추해보는 자리에 온 것이다. 소주처럼 차고 뜨거운, 다시 말해 “격정의 시간을 건너온 고요한 이력”, 즉 격정의 젊은 시절을 고요히 함께해온 ‘소주’. 함께해온 그 이력들이 이제는 “웅덩이 안으로 조금씩 흘러 들어가/ 차고 뜨거운 것을 감싼다”고 한다. 청춘의 불같이 뜨거운 것만으로도 될 수가 없었던 시절, 술 취해 내지른 토악질로 있었을 것이다.
이제 “소주는 차고 뜨거운 것만 아니라” 불순의 어려운 시간들을 견디다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버린 시인처럼, 소주도 “폐허 같은 주름”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래 삭아 쉽게 불그레진 청춘”도 있어 “남은 저를 다 마셔 달라고 기다린다”라고도 하는 우리들의 분신인 저, ‘소주’!
— 강성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9년 5-6월호, 테마로 읽는 현대시_ 술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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