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의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 감상 / 김기택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
— 9. 11에 죽은 여자를 추모하며
김승희
110층 화염의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여자는 핸드폰을 목숨처럼 껴안고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두 신발에 오렌지색 불이 붙은 것을 느끼면서
너를 사랑했다,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꼭두서니빛 불타오르는 화염으로 치마를 물들이면서
너를 사랑했으며 너를 사랑한다, 영원히 사랑한다고
말하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엉덩이를 다 먹고
허리 한복판을 너울너울 화염이 베어먹는 것을 느끼면서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이 불타는 허리 이 불타는 등줄기 이 불타는 모가지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누구나 자기 무덤을 만들 시간은 없지만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는 여자는
난폭한 머리카락 난폭한 두 귀가 갈기처럼 일어서는 것을 느끼며
110층에서 떨어지는 여자는
죽지 마, 죽어선 안돼, 라고 연인이 말할 때
불길이 그녀의 하얀 두 손을 먹고 핸드폰을 녹여버릴 때
그때
바로 그때까지
죽어선 안돼, 절대로 안돼, 라는 연인의 말이 전해진
귀 두짝을 소중히 움켜쥔 채
110층에서 떨어진 여자는
사
랑
해
!
— 시집 『냄비는 둥둥』(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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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ㆍ11 테러사건 때, 무역센터빌딩 붕괴 직전 가까스로 탈출했던 이의 말이 잊히지 않습니다. 건물에서 빠져나오는데 무언가 퍽, 퍽,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서 불탄 잔해들이거니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람들 떨어지는 소리였다는군요. 불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해 창밖으로 몸을 던졌던 거지요.
시인은 110층에서 떨어지는 순간을 길게 늘려 희생자에게 연인과 마지막으로 절박하게 사랑을 나눌 기회를 줍니다. 희생자를 태우는 불에게 "오렌지색 불", 치마를 물들이는 "꼭두서니 빛" 화염, 엉덩이와 허리를 베어 먹는 "너울너울 화염" 등과 같은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줍니다. 마치 사랑을 불로 정화하려는 듯이. 이것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추모하는 시적 방법이죠.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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