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지겨움으로부터의 일탈 / 홍일표
파스칼 아저씨네 과자가게
함기석
의미 있는 시가 하도 지겨워
의미 없는 방정식을 푼다
내가 기호들과 즐겁게 노는데
창가로 팡새가 날아와 앉는다
주머니 달린 빨간 조끼를 입고 있다
선물이야 주인아저씨 몰래 훔쳐 왔어!
새는 과자로 만든 시계를 꺼내 건네준다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발을 꺼내 건네준다
나는 시계를 먹으며 창 밖을 본다
파스칼 아저씨네 과자가게가 보인다
토마토 모자를 쓰고 과자를 굽고 있다
과자들은 모두 숫자로 되어 있다
가게 안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생각도 갈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다시 방정식을 푼다
시계를 먹으며 발을 먹으며
맛있게 맛있게 방정식을 푼다
시간이 새콤달콤 녹아 내린다
두통이 살콤살콤 녹아 사라진다
나는 계속 방정식을 푼다
그런데 아무리 풀어도 해답이 없다
그런데 그것이 해답인 방정식
그런데 그것이 해답인 나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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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팡새’라는 새를 아시나요? 시인들은 가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물을 만들어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조류도감을 뒤적거려 보아도 ‘팡새’를 찾을 수는 없을 겁니다. 시인의 상상력이 창조한 지구상에 없는 최초의 새거든요. 그리고 실제로는 파스칼 영감의 명상록『팡세』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언어유희는 획일화되고 정형화된 사고와 언어 질서를 살짝 비틀어놓는 풍자의 한 방법입니다.
함기석 시인은 ‘의미 있는 시’가 지겹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의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동안 무수한 의미에 길들여지고 사육되고 수십 년 동안 그 의미에 복무하였습니다. ‘의미’는 과연 의미 있는 것인지 화자는 회의하면서『팡세』를 미끼로 던집니다. 새로 변신한 ‘팡새’는 ‘과자로 만든 시계’와 ‘아이스크림으로 만든 발’을 화자에게 선물로 줍니다. 발랄하고 유쾌한 동화적 상상력이 발동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과자는 모두 숫자로 되어 있습니다. ‘의미’로부터 도망친 화자가 ‘의미 없는 방정식’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자가게에는 사람도 없고 생각하는 갈대도 보이지 않습니다.
화자는 발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방정식을 풉니다. 그런데 아무리 문제를 풀어도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서 시인의 재치 있는 시의 보법이 반짝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인간의 삶에는 ‘답 없음’을 발견합니다. 모든 의미와 윤리와 사상의 허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입니다. 파스칼 할배가 머리를 긁적이며 기운 없이 저만치 걸어갑니다.
함기석 시인의 특이한 발명품인 「파스칼 아저씨네 과일가게」는 권투선수의 경쾌한 발놀림과 잽을 보는 것 같습니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가볍게 뛰노는 운율은 시를 시답게 하는 요소입니다. 특히 과도한 의미로 몸이 무거운 시들에게는 청량제 같은 역할을 하지요.
세설원을 안고 흐르는 계곡물이 의미의 무거운 옷을 벗고 시와 뒹굴며 노는 운율 같습니다. 천진한 어린아이 웃음소리 같은 물소리에는 방정식도, 지겨운 비만의 시도 없습니다. 다만 그곳에는 몸 가벼운 한 편의 시가 반짝이고 있을 뿐입니다.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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