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효환의 「지도에 없는 집」 감상 / 김기택
지도에 없는 집
곽효환
지도에 없는 길 하나를 만났다
엉엉 울며 혹은 치미는 눈물을 삼키고 도시로 떠난
지나간 사람들의 그림자 가득해
이제는 하루 종일 오는 이도 가는 이도 드문
한때는 차부였을지도 모를 빈 버스 정류소
그곳에서 멀지 않은 비포장길
지금 어디에 있다고 너 어디로 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지시하던 내비게이션 소리도 멈춘 지 오래
텅 빈 인적 없는 한적함이 두려움으로 찾아드는
길섶에 두려운 마음을 접고 차를 세웠다
오래전 서낭신이 살았을 법한 늙은 나무를 지나
교목들이 이룬 숲에 노루 울음 가득한 여름 산길
하늘엔 잿빛 날개를 편 수리 한 쌍 낮게 날고
투명하고 차가운 개울 몇을 건너
굽이굽이 난 길이 더는 없을 법한
모퉁이를 돌아서도 한참을 더 걸은 뒤
고즈넉한 밭고랑
황토 짓이겨 벽 붙이고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곡식 창고
함석지붕을 머리에 인 처마가 깊은 집이 있다
산나물이 들풀처럼 자라는
담도 길도 경계도 인적도 없는 이곳은
세상에 대한 기억마저도 비워낸 것 같다 그래서
지도에 없는 길이 끝나는 그곳에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집 한 채 온전히 짓고 돌아왔다
————
곽효환 /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과 2002년 《시평》에 「수락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인디오 여인』『지도에 없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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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답하다고 숨 막힌다고 아무 때나 아무 곳으로나 훌쩍 떠날 수 있나요? 생각만 해도 숨이 크게 쉬어지는 곳, 심장이 두근거리고, 기운이 솟는 곳이 마음속에 있다면 어떨까요? 투명인간이 되어 잠시 세상에서 잠적하고 싶을 때, 죽은 듯 이 세상에서 잠시 없어지고 싶을 때, 시공간의 제약 없이 바로 떠날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현실도피라고요? 백석 시인은 눈 오는 밤 나타샤와 함께 깊은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며 차라리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라고 했습니다. 마음도 하나의 생태계라면 세상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공간이 필요하지요. 물론 이 공간은 허구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유로운 곳이죠. 시는 그런 곳에 집 짓는 일을 좋아한답니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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