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가 그린 추상화 한 점
강 인 한
세상에서 제일 그리기 쉬운 건 귀신이나 도깨비 그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귀신이나 도깨비의 실체를 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적당히 쓱쓱싹싹 그려놓고 이게 귀신이라고 말한들 그게 잘못 그려졌다고 따지려면 제대로 귀신을 보지 않고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실제로 본 이가 없는 그 귀신 그림이라는 게 따지고 보면 추상화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추상화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으로 해석이 여러 가지로 가능하기도 하겠습니다. 추상화라 하면 흔히 우리는 피카소를 떠올립니다만 피카소 흉내를 내기란 참 어렵습니다. 몬드리안이나 호안미로가 차라리 흉내 내기 쉬울 겁니다. 피카소 비슷하게 따라가려면 사실적인 그림 그리기를 충분히 수련하고 그런 다음에라야 반추상, 더 나아가 추상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무턱대고 어설픈 반추상이나 어설픈 추상이라면 웃음거리밖에 안 될 것입니다.
태국 여행 가서 코끼리 쇼를 본 적 있습니다. 코끼리들이 축구경기도 하고 농구 시합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쇼의 마지막에 코끼리가 붓을 코로 말아 쥐고 물감을 듬뿍 찍어 화지에 척척 붓 자국을 내는 걸 보았습니다. 그렇게 번갈아 붓을 바꾸고 물감을 바꿔 찍어서 울긋불긋 이른바 한 폭의 추상화를 그려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다지 예술적 감각이 세련되지 못한 터이기는 해도 내가 보기에도 그건 도저히 미술작품으로 보기 어려운 우스꽝스런 코끼리라는 동물을 이용한 장난의 흔적일 뿐이었습니다. 코끼리가 3년쯤 석고데생이나 사실적인 그림을 연마한 연후에 반추상이나 추상의 그림을 그린다는 말은 아직 못 들었습니다.
시에서도 석고데생이나 사실적인 그림 같은 경우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낮인데 화덕불에 된장국이 끓는다
생닭 고는 데
약재로 쓰인다는 엄나무를
한짐 해놓은 마당엔 잡어젓이 익는다
아주까리 노란 새잎을
데쳐 먹으면 맛이 좋다고 하는
한쪽 뺨에 흉터가 난 절름발이 할아배
이른 아침 망태기를 메고
재 너머 독살을 갔다 오는 길에
잡아 온 뱀이 올뱀이라며
깊은 겨울 양식이란다
어슬어슬 갯바닥에서
낙지를 찾는 눈매가
어찌나 돌미륵을 닮았던지
열 손마디에 새까마니 물때가 배어 있다
흰 박꽃 넝쿨이 오르는 돌담엔
내장을 비워낸
물메기 숭어 갯장어가 가지런히 널리었다
— 이세기, 「생업」전문
가난한 어촌 생활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시입니다. 그림으로 치면 사실적인 그림이겠지요. 마당에 땔감으로 엄나무를 한짐 쌓아 놓았고, 마당 한쪽 화덕에는 된장국이 끓고 있습니다. 주인 영감은 한쪽 뺨에 흉터를 가졌으며 절름발이입니다. 얼굴의 흉한 모습뿐만 아니라 그의 일상적 행동 또한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재 너머에서 잡아온 뱀은 겨울 양식으로 마련하고 갯바닥을 훑고 다니며 낙지를 잡고 갯장어를 잡는 게 생업입니다.
사실주의[리얼리즘]라는 게 이렇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불쌍한 이들, 노동자나 농어민, 고달프고 궁핍한 삶을 영위하는 이들의 생활을 실감나게 그대로 그려내는 게 그 특징입니다. 호화로운 재벌 집안의 얘기, 높은 직책의 고관대작 자제들의 눈부시게 화려한 생활을 그려낸 이야기라면 그건 사실주의가 아닙니다. 낭만주의라고나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는 미술에서 반추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시를 한 편 예로 들어볼까요? 피곤하고 강퍅한 현실을 벗어나 한 발 비켜 선 곳에서 바라보는 이런 사랑스런 그림.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손들이 있고
나는 문득 나의 손이 둘로 나뉘는 순간을 기억한다.
내려오는 투명 가위의 순간을
깨어나는 발자국들
발자국 속에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 발자국에 맞서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이 있고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내가 너의 손을 잡고 걸어갈 때
육체가 우리에게서 떠나간다.
육체가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돌아다니는 단추들
단추의 숱한 구멍들
속으로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
—이수명, 「왼쪽 비는 내리고 오른쪽 비는 내리지 않는다」전문
이 시에 대해서는 시인과 같은 대학 선후배 간의 젊은 평론가 신형철의 친절한 해설을 들어보기로 합니다.
“어쩌면, 비는 내리는데 우산은 하나? ‘나’는 ‘너’의 왼편에서 함께 우산을 들고 걷습니다. 그래서 왼쪽 어깨만 젖네요. 나쁘지 않습니다. 그 순간 내 몸을 스쳐가는 어색하고 애틋한 느낌들 때문. 왼손과 오른손이 따로 노는 것만 같고, 어색해서 아래만 보고 걷자니 발자국조차 따라 어색해지고, 이런 식으로 어느덧 내 육체 전체가 한없이 낯설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나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나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시간이 흐르고, 단추가 떨어져나가듯 우리에게서 떨어져나가 뒹구는 느낌들, 느낌들. 그렇군요. 소년과 소녀가 손을 잡으면 세상에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일들이 벌어지는군요. 결론. 시인의 상상력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해도 세상을 바꿀 사람들을 아주 조금씩 바꾸기는 할 것입니다. 이상하고 아름답게, 이수명의 시처럼.”
기왕에 이런 경우로서 내가 쓴 졸시 한 편을 더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앉아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
카페 손님이 그래서 많다
당신은 내 앞에
떠 있다
강이 있고
건너편에는 내가 떠 있다
우리들은 하반신이 지워진 채 마주앉아
앞에 놓인 강에
뛰어들 것인지 말 것인지
오래 들여다본다
지워진 다리들이
비가 내리는 산책로에 우산을 같이 쓰고
가만가만 걸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걸음을 멈춰 마주보고 있을까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담배 두 대, 커피 한 잔
그리고 오후의 카페를 나선다
언젠가 비가 왔고
비에 젖어 눈을 뜨던 길들이
소리 없이 등뒤로 사라진다.
— 강인한, 「오후의 실루엣」전문
“어지럽고 너저분한 세계에서 눈을 돌려 아늑하고 정갈한 정경을 보고 싶지만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지나가는 이 잔혹한 시간의 행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릴없이 녹초로 만든다. 육신이 흐느적거리도록 피로할 때 정적의 순간이 애인처럼 그립다. 정적의 순간을 언어로 포착한 시가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킬 때가 있다. 강인한의 「오후의 실루엣」은 그러한 신비로운 체험을 안겨준다.
이 시의 구도는 독특하다. 시인의 상상력은 비구상 회화처럼 여기 있는 공간을 잘라 저곳에 배치한다. 당신과 내가 마주앉아 있지만 그 사이에 강이 있다. 강 이쪽과 저쪽에 당신과 내가 떠 있다. 진정 그러하리라. 담배 연기 가득한 카페에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지만 연기의 강을 사이에 두고 차안과 피안으로 갈라져 아득한 거리감을 느낀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마주앉아 있는 우리의 하반신은 보이지 않는다. 유리창 밖으로는 보행하는 사람들의 다리가 보인다. 마치 우리의 가려진 다리가 창밖에 돌아다니는 것 같다. 의자에 마주앉아 있으면서도 다른 일을 몽상하며 거리를 헤맨 일이 어디 또 한두 번이었던가.
결국 모든 정황은 무로 돌아가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신과 나는 강의 차안과 피안으로 돌아선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라는 시행은 "담배 두 대, 커피 한 잔"으로 요약되는 무위의 시간의 무정한 흐름을 체험한 자아의 담담한 발성이다. 무엇이 오고 또 무엇이 갈 것인가. 사실은 아무것도 온 것이 없고 어느 것도 간 것이 없다. "언젠가 비가 왔고" 또 그렇게 비에 젖은 길은 "소리 없이 등뒤로 사라"질 뿐이다. 그러나 번잡한 생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렇게 미세한 기미를 포착하여 한 편의 시로 응축해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시인이다. 이 시는 실체를 가린 실루엣이 투명하게 변하면서 허공으로 증발하는 그런 신비의 순간을 체감케 한다. 그 침묵의 눈길은 이제 또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일까? 내가 떠 있고 당신이 떠 있는 시간의 강을 따라 소리 없이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침묵의 파문만 남기면서.”
인용된 글은 평론가 이숭원 교수의 평문입니다. 이 글에서도 지적했지만 나는 비구상 회화,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추상의 그림을 시로 형상화하고 싶었습니다. 카페에 두 남녀가 상반신만 앉아 있고, 그들의 하반신은 우산을 같이 쓰고 비오는 거리를 정답게 산책하고 있습니다. 마치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같은 풍경.
자, 이제는 피카소의 그림에 도전할 차례입니다. 반추상에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추상화로서의 시. 엄밀하게 보면 반추상과 얼핏 구분이 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내 육체의 운전석에 앉은 그대여 내가 세워지는 곳은 언제나 폐허다
철의 기둥
미지의 부름을 기다리는
언어의 피스톤
갑자기 내 팔이 공중으로 뻗는다
사물은 이동한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국경 너머로
변경되는 사물의 이름
나는 내가 들어올리는 사물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세계와 함께 있다
하얀 태양
붉은 대지의 나라
항구에 하역된 화물들이 쌓인다
엄습한 안개 속으로
그대는 다시 사라진다
나는 비어있다
나를 작동시키는 힘의 원천
나는 안개 속에 떠 있는 창백한 얼룩을 향해 나아간다
— 송승환, 「크레인」전문
사실 추상화라는 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이 시 또한 얼마든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해야 합니다. 송승환은 「크레인」이라는 똑같은 제목으로 열 편 가까이 각기 다른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중에 이 한 편은 묘하게 시선을 끄는, 묘하게도 성적인 요소를 함의하고 있는 시입니다.
먼저 이 시의 형태를 보면 아마도 의식적인 듯이 보이는 그 기다란 첫 행이 눈에 띕니다. 그건 마치 골리앗 크레인, 고공에서 길게 뻗어나간 바로 그 크레인의 형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합니다. 그럴지라도 이 시를 한 번 읽고 단숨에 파악하기엔 감춰진 정보가 너무 많습니다. 마치 ‘숨은그림찾기’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나는 이 시를 한 개의 밑그림 위에 또 하나 다른 그림이 그려진 방식으로 이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A라는 그림, 그리고 전혀 다른 B라는 그림의 합성으로.
A의 그림. ‘나’는 철제 크레인입니다. 부둣가에 나는 세워져 있습니다. 운전기사 당신은 운전석에 앉아 철의 기둥을 조종합니다. 미지의 부름이라는 명령대로 당신은 크레인의 피스톤을 작동시켜서 화물을 운반합니다. 선박에 선적되는 화물은 수출품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고, 부두에 하역되는 화물은 수입품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됩니다. 이쪽 부두에 정박한 화물선에서 무거운 짐을 내립니다. 이 부두의 바닥에는 붉은 쇠의 녹물이 뻘겋게 흐르고 하늘엔 하얗게 태양이 빛납니다. 화물 선적이나 하역의 작업을 마친 다음 운전기사인 당신은 크레인을 내려가 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저 멀리 안개 속으로 점점 사라져 가는 당신은 창백한 얼룩처럼 보입니다.
B의 그림. 크레인의 작업을 남녀의 성행위로 윤색해서 부분적으로 덧칠해 그린 것입니다. ‘내 육체의 운전석에 앉은 그대’라거나 ‘철의 기둥’, ‘피스톤’, ‘갑자기 내 팔이 공중으로 뻗는다’, ‘나는 비어 있다/ 나를 작동시키는 힘의 원천’, ‘나는 안개 속에 떠 있는 창백한 얼룩을 향해 나아간다’ 등을 직접 성행위의 움직임으로 대입해 볼 수 있는 표현들인 것입니다. ‘나’는 아래에 누운 남성이고 ‘당신’은 내 위에 있는 여성입니다. 이와 같이 두 남녀가 여성 상위의 체위로 교접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 행위의 끝은 ‘내가 세워지는(발기하여 삽입하는) 곳’ 언제나 허무한 ‘폐허’라는 감정입니다.
일가를 이룬 화가가 항상 멋진 그림만을 그려내지는 못합니다. 형편없는 그림을 그려낼 수도 있습니다. 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언제나 좋은 시만 쓰고 싶은 게 시인 누구나의 소망입니다. 하지만 꼭 자기 욕심대로 시가 써지는 건 아니지요. 시인도 사람인지라 빼어난 수작을 쓸 때도 있고 형편없는 태작(駄作)을 쓸 때도 있습니다. 과거에 훌륭한 시를 썼다고 해서 지금도 높은 수준의 시를 쓴다고 무조건 신뢰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음의 경우를 한 번 살펴보기로 합니다. 멋진 추상화를 그려보려 하였으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이상야릇한 그림이 되고 만 이런 경우.
눈을 뜨지 않고
나는 오늘 오는 중이다.
얼음과 구름의 그래프 철과 오페라의 그래프 쏟아지는 파과들과 동시다발적인 그래프
나는 솟아나는 중이다. 여기에서 거기로
아름다운 풍습에 물들어 날마다의 밑줄들을 매달고 있는 오선지들이 탈선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 지금으로 내일이 휘어진 것이라면 오늘을 돌파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이젠 아니다. 떨어져 나간 의족에 뺨을 부비고 서서 지금이 내일이다. 내일이 쏟아지는 오늘이다.
떨어져 나간 자물쇠가 저 혼자 열리는 꿈을 꾸고 있으니까
양말이 발을 실현하듯 나는 오는 중이다. 양말을 뒤집어보자. 목소리가 없다. 목소리가 없이 아주 길게 시동이 걸린다. 한꺼번에 춤을 추자. 거기에서 여기로 솟구치는 동안
거기를 빌린다. 오늘을 오늘 태어난 표들을 빌린다. 이상한 도표들을 펼치면서 걸어간다. 이건 당나귀 이건 자장가 어디선가 나타나는 또 다른 손목들 언제나 더 많은 붕괴들에 불과하다. 당황하는 통계들에 예를 갖추자. 눈을 뜨지 않고
익명의 그래프들이 일어서고 있다. 번개와 광고의 그래프 빌딩과 총알의 그래프 급진적인 그래프 무너지는 그래프 쓸모없이
나는 오는 중이다.
비인칭 그래프
— 이수명, 「비인칭 그래프」전문
이 시는 『현장비평가가 뽑은 2010 올해의 좋은 시』에 실려 있습니다. 앞뒤 문맥으로 보아 해설을 쓴 평론가가 뽑아서 수록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이 시를 뽑아 올리면서 이 시가 어떤 ‘정서적 가치’를 품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럼 이 시에 대한 추천자인 신형철 평론가의 해설을 직접 읽어 보기로 합니다.
“사전에 따르면 그래프란 ‘서로 관계가 있는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양의 상대값을 나타낸 도형’이다. 그런데 ‘비인칭 그래프’(=‘익명의 그래프’)란 도대체 무엇인가. 특정한 인칭에 귀속되지 않는 어떤 양을 도형으로 표시한 것이겠다. 이 시에서 ‘나’라는 1인칭 대명사는 그 비인칭들 전체를 대신한 어떤 ‘나’일 것이다. 그 ‘나’는 계속 “나는 오는 중이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그 어떤 비인칭적인 양들이 우리의 삶의 세계로 부단히 진입해 오고 있는 중이고, 시인은 지금 그것들의 역동적인 진입을 그래프를 보듯이 보고 있다. 얼음과 구름의 그래프, 철과 오페라의 그래프, 쏟아지는 파과(破果)들과 동시다발적인 그래프, 번개와 광고의 그래프, 빌딩과 총알의 그래프, 급진적인 그래프, 무너지는 그래프…….
독특한 ‘인식적 가치’와 수려한 ‘미적 가치’를 갖고 있어서 ‘올해의 좋은 시’로 천거했지만, 나는 이 시가 어떤 ‘정서적 가치’를 품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이 시는 즐거운 시인가 슬픈 시인가 아니면 제3의 무엇인가. 그러나 이 모호함은 이 시를 자꾸 되풀이 읽도록 유혹하는 매력적인 모호함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난해시’라는 말은 투박한 말이다. 원숙한 모호함과 미숙한 모호함이 있고 이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곧 안목이다. 이 시를 전자의 좋은 사례로 추천한다.”
내가 보기에 이 시는 무슨 인식적 가치가 독특한 것도 없고, 미적 가치가 수려하다고 느낄 만한 표현도 없습니다. “자물쇠가 저 혼자 열리는 꿈을 꾸고”, “양말이 발을 실현하듯” 두 구절 정도가 상식의 판단으로 긍정적인 공감을 할 수 있을 뿐, 첫머리의 “나는 오늘 오는 중이다.”부터 끝까지 전혀 논리적 판단을 가능하게 하지 않는 시입니다.
시가 논문이 아닐진대 그 바탕에 정서가 내재함은 상식입니다. 정서가 아닌, 해석하기 어려운, 뒤틀리고 어긋난 논리의 표현이 결국 이런 시(글)로 나타났습니다. 이 시를 ‘좋은 시’로 뽑은 건 단지 과거에 평론가가 그의 시세계에 무척 매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수명 시인 특집.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 계절에 멋진 시를 발표했군요. 1994년에 등단했고 지금까지 네 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아마 잘 모르시리라 짐작합니다. 비평가들이 자주 왈가왈부하는 시인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는 편도 아니니까. 그러나 저는 이 시인이 없었더라면 한국 시단이 많이 따분해졌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천박한 구분법을 양해해주신다면, 감동에 취약한 다수 독자들에게 호소하는 ‘헤픈 시’가 있고 감동을 경계하는 소수 독자들에게 말을 거는 ‘도도한 시’가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후자에 해당하는 시를 쓰는 시인들이 최근 많아졌는데, 이수명 시인이야말로 그들의 ‘은밀한 선배’라는 생각.”(2009. 9. 25 한겨레21 [시 읽어주는 남자-벼르고 별렀던 이수명 특집])
이라는 지난날 평론가 신형철이 쓴 헌사가 그것을 입증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수명 시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와 신뢰 때문에 시인의 태작(駄作)조차도 뭔가 있는 시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즘 이 시인은 과거의 자기 세계를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고자 고심하며 연구, 천착하다가 이러한 소통 불능의 딜레마에 봉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뭔가 그럴싸한 새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자기도 모를 소리를 지껄이게 된 것입니다. 점프를 하다가 발이 꼬인 피겨스케이팅 선수처럼, 대사를 외다가 혀가 꼬인 배우처럼.
혼자만의 내면에 갇힌, 생각이 미처 정리되지 못한 그 혼란 자체, 이것을 펼쳐내어 정돈해서 읽을 능력이 있는 독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일반 독자는 물론이거니와 이수명의 이 시를 읽은 어떤 시인도 이 시에 대해서 참으로 훌륭한 시라고 공감하며 박수쳐 줄 만한 이가 없습니다. 태국의 그 코끼리가 아무렇게나 붓을 내둘러 그린 어설픈 추상화보다야 낫겠지만, 이것은 ‘원숙한 모호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설명되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난해한 글도 아니고(난해시란 누군가는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가 되는 시), 단지 그냥 혼자 중얼거린, '쓸모없이' 모호한 글일 뿐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이상하게 비틀려져 버렸지만, 이 어려운 딜레마의 시기를 벗어나면 아마 이수명 시인은 환골탈태한 멋진 시를 우리들 모두에게 보여주리라 기대하고 싶습니다.
( 2010. 11. 6. 55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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