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의 「뒤안을 나오며」 감상 / 손택수
뒤안을 나오며
정병근 (1962~)
버둥거리는 염소의 입에 소금을 먹이고
목을 따자,
몇 번 몸을 떨던 염소는 곧 조용해진다
노파가 양은솥을 대고 피를 받아낸다
염소의 뜬 눈이 광속으로 허공을 가른다
영감이 버너불로 염소를 그슬린다
불똥 속에 드러나는 염소의 얼굴
어금니를 꽉 다문 저 무표정이 무섭다
털을 다 그을린 영감이 담배를 피워 문다
담배를 빠는 볼이 대추꼭지처럼 쪼글쪼글하다
염소보다 영감의 팔자가 더 세서
염소는 죽어서도 영감을 저주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기억하며 사는 인간만이 불행할 뿐,
기억이 짧은 염소는 그 짧은 기억의 힘으로
죽으면 죽었지 미련 하나 남기지 않는다
오후의 설핏한 해가 힘 센 허기를 몰고 온다
허기는 얼마나 골똘한 망각인가
뒤안을 나오는데 우리 속의 염소들이
누구시냐는 듯 멀뚱멀뚱 쳐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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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묻어놓은 도토리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다 이내 말끔히 잊어버릴 줄 아는 다람쥐와 어치처럼 망각의 능력으로 하여 숲은 푸르름을 유지한다. 이 위대한 능력을 부러워한 니체의 말. “순간이라고 하는 말뚝에 매어있기 때문에 그들은 우울하지도 않고 권태롭지도 않다. 이를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힘든 일이다.”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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