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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황동규의 「오미자술」감상 / 손택수

by 솔 체 2015. 12. 17.

황동규의 「오미자술」감상 / 손택수

 

오미자 술

 

   황동규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

설악산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뀌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고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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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효란 나와 너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 너는 내게로, 나는 네게로 스며들어가 색상도에선 볼 수 없는 빛깔로 어우러지는 것. 그냥 떫은 맛을 ‘가볍게 떫고 맑은 맛’으로 바꾸어 주는 것. 다만 여기까지였다면, 시는 뻔한 계몽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랑의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전에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는’ 저 환한 갈등의 순간을 놓칠 수 없다. 차이의 공존을 통해 우리는 간신히 나이면서 너가 된다. 설악산의 정기를 받은 오미자 양과 30도나 되는 불 같은 성미의 막소주 군이 차린 신방이 그렇다.

 

손택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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