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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송찬호의 「존 테일러의 구멍 난 자루」평설 / 문혜원

by 솔 체 2015. 12. 16.

송찬호의 「존 테일러의 구멍 난 자루」평설 / 문혜원

 

존 테일러의 구멍 난 자루

 

  송찬호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그 자루의 옆구리에 난 총알구멍으로

존 테일러의 부유한 피와 살이

모두 빠져나가는 데 걸린 시간은

채 다섯 달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존 테일러의 마지막 시간이

꼭 쓸쓸했던 것만은 아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호스피스 모임에서 나온

부패가 따뜻하게 그의 영면을 도왔고

또 코를 감싸 쥘 만큼의 악취가 그 옆을 지켰다

 

그러고 보면, 주위에서 그와 같은

납치나 실종사건이 드문 일만은 아니다

존 테일러는 옆구리를 움켜쥔 채

갇힌 자루 속에 웅크리고 누워

그의 허벅지에, 그리고 푸른 자루의 허벅지에

피를 찍어 이렇게 썼다

국가는 개새끼, 왜 나를 도우러 오지 않는 것인가

 

존 테일러는 다섯 달 만에 어두운

농가 수로에서 뼈만 남긴 채 발견되었다

자루는 아주 가벼웠다

그런데, 그가 입고 있던 양복 안쪽에

새겨진 존 테일러라는 이름은

그의 이름인가 양복 상표 이름인가

이 모든 것은 썩지 아니한가

 

 

 

                                  —《문학과사회》 2009년 가을호

                                  — 2010년 제3회 이상시문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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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전반부에서 ‘존 테일러’는 서부극에 나오는 비운의 총잡이 혹은 국가적 기밀에 연루된 이중 첩보원같이 중요하고 비밀스러운 인물로 여겨진다. 그는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다가 납치되어 푸른 자루 속에서 총을 맞은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국가는 개새끼. 왜 나를 도우러 오지 않는 것인가”. 투철한 애국심과 사명감으로 제 한 몸을 버린 ‘그’들이 죽어가는 모습은 비극적이고 아름답다. 지옥훈련을 거쳐 단련된 일급 스파이인 ‘그’들은 국가 간 혹은 거대세력 간에 이루어진 모종의 결탁과 협상의 결과로 제거된다. 기밀을 수행했던 자는 그 기밀을 누설할 위험 때문에 임무가 끝나면 죽어야 한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지 않는가. 그래서 ‘그’들의 죽음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이국적이고 드라마틱한 풍경은 마지막 연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존 테일러’는 비극적 영웅의 이름이 아니라 죽은 자의 양복에 새겨진 상표 이름이었던 것. 총잡이도 스파이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인 사내는 농가 수로에 박힌 볼품없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빚에 몰려 쫓기고 있었거나, 돈을 목적으로 납치당했거나, 사소한 다툼 끝에 우발적 살인의 대상이 되었거나, 다섯 달 동안 아무도 찾지 않고 찾아가지도 않은 뼈만 남은 시체, 살과 피는 사라져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으나 양복 상표는 썩지 않고 선명하게 남았다. ‘존 테일러’. 서늘하지 않은가.

 

문혜원 (문학평론가, 아주대 교수)

 

 

                — 『 2010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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