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시인과 아마추어 시인 / 홍일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이건청
한때, 나는 소금창고에 쌓인 흰 소금 속에 푹 묻히고 싶은 때가 있었다. 소금 속에 묻혀 피도 살도 다 내어주고 몇 마디 가벼운 말로 떠오르고 싶은 때가 있었다.
마지막엔 '또르르 또르르' 목을 울리는, 한 마리 노고지리 되어 푸른 보리밭 쪽으로 날아가고 싶은 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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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예상하는 번트를 대는 것은 프로가 아니지요.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태와 상식을 깨고 예기치 않은 정서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이 시입니다. 시는 지루하고 고루한 일상을 거꾸로 뒤집어 보여주기도 하고, 매일 보던 풍경을 매우 낯설게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건청 시인의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는 제목에서부터 이질적인 두 언어가 충돌하면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소금창고’와 ‘노고지리’의 낯선 결합이지요. 그런데 독자의 눈길은 바로 그곳에 오래 머뭅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조심스럽게 시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서로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하여 일상적인 의미를 넘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표현 기법을 데뻬이즈망 기법이라고 합니다. 데뻬이즈망은 원래 환경, 습관 등을 바꾼다는 뜻이었지만 타성적인 연상 작용을 거부하고 낯선 이미지로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초현실주의 회화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층위가 다른 낯선 심상의 병치로 시적 환기력을 높이고 있는 이 시는 세 가지 소재가 시의 주축을 이룹니다. 소금창고, 노고지리, 보리밭이 바로 그것이지요.
소금은 정화, 청정, 신성 등의 상징성을 띤 사물입니다. 화자는 소금 속에 묻혀 ‘피도 살도 다 내어주고’ 자 합니다. 오욕과 질곡의 현실에 오염된 시적 자아는 존재의 혁신을 꿈꾸는 것이지요. 그리고 ‘몇 마디 가벼운 말’로 떠오르고 싶어 합니다. 육신을 정화하고, 정화된 육신은 다시 비상을 염원합니다.
‘노고지리’는 화자의 분신입니다. 높이 나는 종다리의 다른 이름이지요. 탈각한 존재의 새로운 모습으로 화자가 지향하는 곳은 ‘푸른 보리밭’입니다. ‘소금창고’에서 ‘보리밭’까지의 비행은 관습과 염오로 미만한 세계를 돌파하는 신생의 에너지입니다.
남이 예상하는 번트를 대는 것은 프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립니다. 이 시의 미덕은 낯설게 보여주기에 있습니다. ‘소금창고’에서 비상한 ‘노고지리’가 푸르게 일렁이는 ‘보리밭’ 위를 마음껏 날아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읽는 이의 몸과 마음도 덩달아 맑고 가벼워집니다. 이것이 바로 좋은 시가 독자에게 주는 귀한 선물이지요.
홍일표
(문화저널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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