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리뷰】
감각의 통로에서 바라본 시들
―홍일표, 서안나, 이민하의 시
강 인 한
고양이를 움직이는 것은 한 마리의 쥐도 아니고
쥐를 표절한 그림자도 아니다
고양이의 주린 배는 풍랑을 주식으로 한다
고양이는 파도나 해일쯤은 적당히 요리할 줄 안다
담벼락에서 뛰어내린 고양이는
오랫동안 바람의 낙법을 익힌 터라
바닥의 돌부리 정도는 몸이 먼저 널름 삼킨다
한때 말랑말랑한 구름으로 뒹굴다가
혼자 웅얼거리는 골목을 몸 안에 집어넣은 고양이
어둠의 심장을 두근거리며
눈 감지 못한 잉걸불 같은 눈으로 밤을 사냥한다
한순간 높은 담벼락이 구겨져서
고양이 발 앞에 납작 엎드린다
검은 고양이에게 사육된 밤이
제 몸의 어둠을 뜯어내며 걸어가는 새벽
볼펜 끝에서
누군가의 검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흘러나온다
—홍일표, 「불 켜진 고양이」(『시에』2010, 가을호)
지난 10월 15일은 시단에 세 가지 행사가 겹친 날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망설이지 않고 나는 출판문화회관을 향했다. 신현정 시인 1주기 추모시제. 이 행사를 위해서 자기 일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앞장서서 발 벗고 나선 이들이 홍일표 시인과 최호일 시인이었다. 둘 다 최근 시를 부쩍 많이 발표하고 있고 또 그 작품들이 알토란처럼 여물었다.
여기 먼저 추켜 든 것은 홍일표의 시. 요즘 그가 발표한 것 아무거나 허투루 대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편편이 바짝 옷깃을 여미고 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말 놀랍다. 「불 켜진 고양이」는 밤중에 환하게 눈에 불을 밝힌 고양이이리라. 고양이는 지금 응시하고 있다. 캄캄한 어둠 속의 전망을. 이 고양이는 안락하게 집안에서 사람의 손에 길들여지고 사람의 품에서 안겨 노는 그런 고양이가 아니다. 야성의 본능에 충실한 고양이인 것이다. 고양이를 움직이는 것은 ‘풍랑’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된다. 그것은 먹이를 위한 활동뿐만 아니라 부닥치는 위험, 불안 등 고양이가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데 가해지는 모든 위해요소가 집약된 표현이다.
시의 표면에 화자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것을 경계한 저 감각적 표현은 두고두고 음미할 만하다. 고양이는 “바람의 낙법을 익”히고서 “바닥의 돌부리 정도는 몸이 먼저 널름 삼킨다”, “혼자 웅얼거리는 골목을 몸 안에 집어넣은 고양이”가 잉걸불 같은 눈으로 사냥을 나선 밤 “한순간 높은 담벼락이 구겨져서/ 고양이 발 앞에 납작 엎드린다”는 것. 박진감 넘치는 대상의 묘사를 따라가느라 손에 땀이 쥐어지고 읽는 이의 심장 박동이 스스로 느껴질 정도다. 이제 홍일표의 시에 나타난 ‘고양이’의 진화를 더듬어본다.
생선이나 육류를 좋아하는 식성이 닮았다
냉장고와 고양이는 아픈 기억 탓인지
긴 꼬리를 등 뒤에 감추고 산다
고양이는 주로 검정을 선호하고
냉장고는 주로 흰색을 선호한다
—「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부분
마음에 박힌 가시뼈까지 소화시키던 고양이가
동그란 눈알의 불을 끄고 시계를 먹는다
적당히 우물거리다가 삼키는
동글동글 잘게 부서진 시계
—「시계를 먹는 고양이」부분
단순한 시적 대상에서 출발한 고양이(「고양이와 냉장고의 연애」)는 시인의 색다른 의미 부여(「시계를 먹는 고양이」)로 나타나다가 이 시에서는 대상과 화자의 심정적 일치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의 마지막 연을 본다. 앞에서 진술된 저 객관으로서의 대상인 야성의 고양이. 고양이의 검고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바로 시인의 볼펜 끝에서 흘러나온다. 보라, 한 순간 저 고양이가 놀랍게도 다름 아닌 화자 자신의 모습으로 돌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개성적인 감각의 옷을 입은 홍일표의 시에는 그만의 연륜이 쌓여 있으면서도 젊은 신예 못지않은 패기가 있다. “개가 개의 꿈을 빠져나오는 동안…공원의 가로등은 아무 것도 결심하지 않았는데/ 불이 켜지네” —「이면의 무늬」와 같은 다른 시들도 그의 시의 뛰어난 성과일 것이다.
간절한 얼굴을 눕히면 기다리는 입술이 된다
한 사내가 한 여자를 큰물처럼 다녀갔다 악양에선 강물이 이별 쪽으로 수심이 깊다 잠시 네 이름쯤에서 생각이 멈추었다 피가 당기는 인연은 적막하다
내가 당신을 모르는 것은 내가 아직 나를 모르기 때문이다 슬픈 육체가 육체를 조금씩 밀어내던 창백한 그 여름 당신의 등은 짚어낼 수 없는 비밀로 깊다 꽃은 너무 멀리 피어 서러움은 뿌리 쪽에 가깝다
사랑을 통과한 나는 물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던 비애 우리는 어렵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 내가 놓아 보낸 계절들 물결로 밀려드는 이별의 질서 나는 당신이란 한 문장을 쉽게 놓아 보내지 못한다 강물에 손을 담그면 당신의 흰 무릎뼈가 젖어 있다
—서안나, 「이별의 질서」(『詩로 여는 세상』2010, 가을호)
먼저 산문시를 생각해본다. 시를 산문으로, 줄글로 쓴 게 산문시일 게다. 몇 사람의 잘 나가는 시인이 산문시를 쓴 적이 있다. 그러자 너도나도 산문시를 써대고, 하다못해 자유시 형태 어디 한 군데라도 산문처럼 풀어 쓰는 게 유행이다시피 되었다. 산문시가, 시적 긴장이 풀어져 마침내 시가 아니라 산문으로 떨어진 것들이 많아져버렸다. 시의 팽팽한 긴장 요소인 함축이나 운율, 이미지 또는 비유 등을 무시한 채 산문으로 쓰되 단순히 남다른 주제의식을 내세우면 그게 산문시인 양 착각한다. 어느 지면에선가 정진규 시인이 행의 구분을 드러낸 자유시들이 오히려 산문으로 풀어진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예컨대 이런 글을 두고 말했으리라.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 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셍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할 것이더라(……)
일찍이 꽤 이름을 날린 중견 시인이 ‘시’라고 발표한, 틀림없는 산문의 전반부이다. ‘소멸’이라는 그럴싸한 주제의식을 곁들였다고 하나 이게 무슨 시일 것인가. 위에 예로 든 서안나의 산문시와 한 번 비교해볼 일이다. 시는 산문으로 써놓아도 시의 본성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야 시다. 행 구분이 있다고 시는 아닐 것이다. 호박에 먹물로 줄을 긋는다고 그게 어디 수박이 될 것인가.
얼핏 산문의 형식에 기대고 있는 서안나의 시에는 ‘악양에서 이별을 생각하다’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곳. 최참판댁을 이제는 관광명소로 꼽고 있다. 소설 속의 적당한 장소를 물색해보고 그 자리에 적당히 최참판댁이라고 이름 붙여 집을 지었음에도 아예 최참판네 식구들 그러니까 소설 속의 서희네 일가가 그 집에서 살았었다고 사람들은 철석같이 믿는다. 그게 허구의 진실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구경하러 다니기 좋아하는 장삼이사의 무지요 몽매일 뿐이다. 어쩌면 서안나의 이 시를 보고서도 누군가는 엉뚱한 상상을 하고 또 그렇게 굳게 믿을는지도 모른다. 한심한 일이지만.
옛날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인동덩굴과 같은 치렁치렁한 가락에 실어 이 시는 비밀스럽고 격렬한 사랑과 그 이별의 깊이를 감각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간절한 얼굴을 눕히면 기다리는 입술이 된다”는 첫 연. 이 문장은 간절한 얼굴, 눕히다, 기다리는 입술로 의미가 세분된다. 서로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랑을 갈구하는 얼굴들, 그리고 가만히 몸을 눕히는 동작과 그에 뒤따르고 있는 입술의 조용한 기다림. 둘째 연에서 시는 급한 물살의 흐름을 탄다. “한 사내가 한 여자를 큰물처럼 지나갔다”로 간단하게 표현된 사랑의 정체나 그 내막에 대해선 알 길이 없다. 다만 ‘큰물’로 비유된 사랑임에 두 연인이 격렬한 사랑의 물살에 휩쓸렸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건 진행형이 아니라 ‘큰물’로 ‘다녀갔’음에 유의해야 한다. 홍수가 휩쓸고 가버린 것처럼. 남은 건 황량한 사랑의 기억일 뿐. 시의 화자는 떠나간 이의 방향과 사랑의 깊이, 아니 이별 후 그 아픔의 깊이를 응시하고 있다. 화자는 계절이 바뀌고 또 바뀌어도 결코 그 홍수처럼 휩쓴 비밀스런 사랑이 어떻게 오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한 채 쉽게 잊을 수 없다.
최근 서안나의 시는 「매화 분합 여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고전적 감각 취향의 시들과 모던한 감각의 연작 「따뜻한 국경」과 같은 두 갈래의 시들을 동시에 밀고 나가고 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흐름의 시를 밀고 나갈 수 있는 추진력의 정체가 자못 궁금하기도 하다.
얼굴을 모두 태웠으니 뼈대를 털어
촛농처럼 눈물을 쏟으세요
채널은 돌아가고
누구에게도 모두에게도 당신은 등을 돌릴 수 있습니다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나는 당신을 더듬고
지난 시즌에도 어둠 속을 돌아봤지만
끈이 풀린 대화는 스핀이 부족합니다
이해하세요 당신이 울고 있을 때 나는 잠들었습니다
당신의 광팬으로서
눈물을 가로챈 여자가 관중석을 박차고 일어났어요
이제 막 상경한 그녀는 단숨에 포디움까지 올라섰어요
정오의 갈라쇼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夜外 벤치에 누워
당신의 뒷모습에 몰입합니다
냉동실에 눌어붙은 코처럼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나는 당신을 돌려세우고
다음 시즌에도 어둠 속을 내다보겠지만
발이 꼬인 시간은 점프가 부족합니다
당신이 달아나는 한 나는 외로움의 배경입니다
눈의 여왕으로서
당신이 울음을 털 때 비로소
나는 두 손을 텁니다 격렬하게
룰의 마지막은 기립박수
떠날 때는 누구나 키스 아니면 크라이
비둘기처럼 키스를 날리세요
플래시가 터지고
누구에게도 모두에게도 당신은 눈을 맞출 수 있습니다
해변으로 몰려가는 여름의 신도들이
빙질을 복구하는 화동들을 팥빙수처럼 갈아엎지만
얼굴이 섞여도 스텝은 멈추지 않습니다
발목이 잘려도 음악은 끝나지 않습니다
—이민하, 「키스앤크라이」(『문장 웹진』2010, 10월호)
제법 긴 이민하의 이 시를 처음 대했을 때는 솔직히 골치 아픈 요즘의 시들 가운데 하나려니 생각했다. 쉽사리 독자에게 읽히기보다는 차라리 읽히지 않는 '불편한 소통’의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지나칠 정도로 시와 시인에 대한 편식이 심한 어느 평론가의 말에 잠시 귀를 기울여본다.
“독특한 ‘인식적 가치’와 수려한 ‘미적 가치’를 갖고 있어서 ‘올해의 좋은 시’로 천거했지만, 나는 이 시가 어떤 ‘정서적 가치’를 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시는 즐거운 시인가 슬픈 시인가 아니면 제3의 무엇인가. 그러나 이 모호함은 이 시를 자꾸 되풀이 읽도록 유혹하는 매력적인 모호함이다.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난해시’라는 말은 투박한 말이다. 원숙한 모호함과 미숙한 모호함이 있고 이것을 구별하는 능력이 곧 안목이다. 이 시를 전자의 좋은 사례로 추천한다.” 이 평론가의 높은 안목으로 추천된 해당 시를 잠깐 읽어본다.
눈을 뜨지 않고/ 나는 오늘 오는 중이다.// 얼음과 구름의 그래프 철과 오페라의 그래프 쏟아지는 파과들과 동시다발적인 그래프// 나는 솟아나는 중이다. 여기에서 거기로// 아름다운 풍습에 물들어 날마다의 밑줄들을 매달고 있는 오선지들이 탈선하고 있으니까 거기에서 지금으로 내일이 휘어진 것이라면 오늘을 돌파하지 못하겠지 그러니 이젠 아니다. 떨어져 나간 의족에 뺨을 부비고 서서 지금이 내일이다. 내일이 쏟아지는 오늘이다.// 떨어져 나간 자물쇠가 저 혼자 열리는 꿈을 꾸고 있으니까.// 양말이 발을 실현하듯 나는 오는 중이다. 양말을 뒤집어보자. 목소리가 없다. 목소리 없이 아주 길게 시동이 걸린다. 한꺼번에 춤을 추자. 거기에서 여기로 솟구치는 동안 (……)
「비인칭 그래프」라는 작품 전체의 3분의 2정도까지 인용했는데 이 원숙하게 모호한(?) 시를 쓴 시인은 지난날 이렇게 완벽한 불통의 시를 쓰진 않았다. 아마도 개성적 자기표현을 천착하고 추구하다가 이런 구렁텅이에 불시착하는 표현의 한계에 도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시인 자신은 물론 옛날의 독자와 옛날의 그를 기억하며 아직껏 맹신적으로 지지하는 평론가에게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키스 앤 크라이 존(Kiss & Cry Zone)에 돌아온 김연아 선수를 보고 이민하가 이 시를 썼을 거라는 어느 미지의 독자가 쓴 글을 읽었다. 나는 이 시에 대한 난해한 매듭이 거기서 풀리자 속으로 무릎을 쳤다. 키스 앤 크라이 존! 피겨 스케이팅 선수가 화려한 연기를 펼치고 돌아와 코치랑 나란히 앉아서 채점된 점수의 결과를 기다리는 장소. 점수 결과에 기뻐하며 관중들에게 스카이키스를 날리기도 하고 반대로 속이 상해 얼굴을 감싸 쥐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곳.
혼신의 힘을 다하여 경기를 마치고 돌아왔으므로 그녀는 펑펑 울어도 좋을 것이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그녀의 경기를 보았고 그녀가 낙담하여 울 때 나는 채널을 돌린 다음 잠을 청했다. 광적으로 열성적인 그녀의 팬은 관중석을 박차고 일어나 연단(포디움)에까지 올라서서 응원의 구호를 외치기도 하였다. 어쩌다 발이 꼬여서 점프가 불완전할 때 그 실수로 인해서 그녀가 울 때 나는 더 힘껏 격려의 박수를 친다. 모든 경기가 끝나고 그녀에게 쏟아지는 기립박수. 관중들에게 비둘기를 날리듯 키스를 날리거나 속상한 마음에서 울음을 터뜨리거나. 현지에서는 정오에 행해지는 갈라쇼를 나는 여기에서 텔레비전으로 밤중에 본다. 경기에 참가한 선수들이 빙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 얼굴이 뒤섞이고 발의 스텝이 뒤섞여도 쇼의 음악은 계속된다. 전체적으로 눈부신 이미지와 시선의 균형이 아름다운 감각적인 시였다.
처음엔 이 시를 읽다가 “정오의 갈라쇼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夜外 벤치에 누워/ 당신의 뒷모습에 몰입합니다/ 냉동실에 눌어붙은 코처럼”에서 ‘夜外’라는 한자 조어가 식상하여 텍스트로 선정하는 것을 그만둘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단지 지구 건너편 저쪽 정오의 쇼를 나는 여기서 밤중에 구경하고 있다는 정도의 뜻으로 이해하기로 하였다. 중의적 기법을 생각한다손 쳐도 가을비를 ‘가을 悲’라고 쓰는 억지는 영 꼴불견이지 않은가.
—《시안》 201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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