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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주체의 회복을 꿈꾸는 시 / 홍일표

by 솔 체 2015. 12. 5.

주체의 회복을 꿈꾸는 시 / 홍일표

 

모르는 노래

 

   신해욱

 

 

어이. 귀를 좀 빌려줘

 

모르는 노래가

내 입 안에 가득 고여 있어.

 

해야만 할 어떤 말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지만 이건 이미

내가 있기 오래 전에 끝난 노래들.

 

나를 지우고

나를 흉내 내는

무서운 선율.

 

이봐.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있어.

 

필시 너는 내 편일 테니

나를 좀

이 노래에서 벗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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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욱의 시는 깐깐하고 도도합니다. 쉽게 곁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너무 쉽게 속을 다 드러내 보이는 시는 밋밋하고 재미없지만 이런 시는 읽을수록 맛과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갈하게 펼쳐진 사유의 지평을 함께 걸어보시지요.

   화자의 입안에 ‘해야만 할 어떤 말들’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가슴 속 말을 내뱉을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있고, ‘모르는 노래’는 ‘내가 있기 오래 전에 끝난’ 것들입니다. 그 노래들은 나를 지우는 ‘무서운 선율’들이지요.

   화자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내가 수용할 수 없는 과거입니다. 그것은 곧 폭력적 이데올로기요 획일화된 질서와 제도입니다. 화자는 과거의 정형화되거나 규격화된 삶의 문법을 거부합니다. 길들여지고 순응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비록 그것이 노래의 형식으로 존재하지만 ‘모르는 노래’는 단지 ‘나’를 압박하고, 존재의 정체성을 은폐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여기서 화자는 새로운 발화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그러나 현실의 질서는 공고하고 오히려 ‘나’의 욕망을 거세하여 구각의 제도에 편입시키려 합니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갑니다. 충격과 쇄신의 삶을 지향하는 화자는 현실을 회의하며 노래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지만 현실은 끝없이 지루한 반복과 권태로 이어집니다. 이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화자는 구원의 방향을 탐색합니다. 그 탐색은 곧 존재의 이유요 혁신의 기도이지요.

   화자는 마지막으로 ‘이 노래에서 벗겨줘’라고 호소하며 새로운 일탈을 꿈꿉니다. ‘해야만 할 어떤 말들’을 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모르는 노래’에 발목 잡혀 있었던 화자는 이제 자기만의 고유한 노래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의 어긋난 삶은 타율적 질서에 얽매인 일그러진 존재의 모습이었던 것이지요. 주체의 회복을 꿈꾸는 화자의 길은 지난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길이 시의 길이요 재생과 갱신의 길이라는 것이지요.

   깐깐한 시 한 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르는 노래’를 되풀이하여 부르고 있는 앵무새일지 모릅니다. 나만의 노래를 찾지 못한 저녁 그림자가 더 깊고 우울해집니다. 어느덧 겨울입니다.

 

 

홍일표

(문화저널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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