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동규의 「오미자술」감상 / 손택수
오미자 술
황동규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뀌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고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발효란 나와 너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 너는 내게로, 나는 네게로 스며들어가 색상도에선 볼 수 없는 빛깔로 어우러지는 것. 그냥 떫은 맛을 ‘가볍게 떫고 맑은 맛’으로 바꾸어 주는 것. 다만 여기까지였다면, 시는 뻔한 계몽적인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랑의 화학반응을 일으키기 전에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는’ 저 환한 갈등의 순간을 놓칠 수 없다. 차이의 공존을 통해 우리는 간신히 나이면서 너가 된다. 설악산의 정기를 받은 오미자 양과 30도나 되는 불 같은 성미의 막소주 군이 차린 신방이 그렇다.
손택수 <시인>
'문학 참고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병근의 「뒤안을 나오며」 감상 / 손택수 (0) | 2015.12.20 |
---|---|
좋은 시와 나쁜 시/박태일(시인, 경남대 교수) (0) | 2015.12.18 |
송찬호의 「존 테일러의 구멍 난 자루」평설 / 문혜원 (0) | 2015.12.16 |
프로 시인과 아마추어 시인 / 홍일표 (0) | 2015.12.15 |
구광렬의 「불맛」감상 / 손택수 (0) | 2015.12.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