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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김성규의 「붉은 샘」감상 / 이진명

by 솔 체 2017. 3. 9.

김성규의 「붉은 샘」감상 / 이진명

 

붉은 샘

 

   김성규

 

 

돼지의 멱을 따자 피가 쏟아진다

칼은 부드러운 살을 헤집고

더 큰 물길을 찾는다

붉은 물, 반짝이며 쏟아지는

붉은 물, 이빨 빠진 노인들이 웃는다

바들바들 떠는 돼지

혓바닥이 말려들어간다

온몸의 소리가 빠져나간다

주머니처럼 매달린 간을 삼키며

노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한다

초상집 뒤뜰

양동이에 가득 담긴 핏덩어리

더 이상 피를 뱉지 못하는

돼지의 살갗에 뜨거운 물이 부어진다

울음이 빠져나간 육신을 위하여

노인들은 한번씩 붉은 샘을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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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상집 뒤뜰에서 돼지가 잡힌다. 돼지는 혼신의 힘을 다해 죽어가고, 노인들은 신명을 다해 피와 간을 즐긴다. 선연한 영상과 도취의 분위기. 도륙과 비참의 검은 현실이 ‘노인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노인들은 한번씩 붉은 샘을 판다’라는 대단히 미적인 쾌락을 선사하는 구절들에 걸리며 기묘한 초현실의 맛을 자아낸다.

   너무나도 사실적일 때 오히려 현실감이 물러나지 않던가. 붉은 물, 붉은 샘이라는 말의 색채감과 환상성이 내내 시를 이끌어와서일까. 죽음의 장소에서, 죽음을 앞둔 노인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며 돼지 간과 돼지 피를 삼키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아름답고 선한 무언극만 같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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