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감각의 문법에 기초한 시, 진은영의「그 머나먼」/ 홍일표
그 머나먼
진은영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들의 천왕성보다 시인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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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를 지시적 의미로 한정하여 소통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체계화된 언어는 관습과 제도에 충실하다. 그러나 언어의 바깥에 존재하는 비언어적 세계도 있다. 삶의 구체적 감각은 언어 밖에 존재한다. 특히 시의 언어는 그렇다. 시는 언어에 선행한다. 관습화된 언어의 틀을 쉼 없이 박차고 나가려고 하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언어 체계를 넘어서 경계의 지점까지 치고 나가는 것이 예술의 속성이요 시의 운명이다. 번역 불가능한 세계, 정형화된 세계 인식의 바깥에 오롯이 서 있는 것이 시라고 할 수 있다. 진은영의 이 시는 새로운 감각의 문법에 서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가까이 있는 것과 멀리 있는 것의 대비를 통하여 화자가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진실에 가까운 삶의 실체이다. 가까이 있는 것은 익숙한 일상의 질서요 사물들이다. 너무나 친숙하여 아무런 정서적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고 타성과 구각의 울타리 안에서 공고해진 관습이고 치열한 생의 불꽃이 사라진 주검의 사물들이다.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에 고착된 시선을 거두어 화자가 지향하는 곳은 ‘멀리 있는 것들’이다. 멀리 있는 것들은 익숙하지 않은 세계이며 능욕과 치욕의 일상이 아닌 오로지 신생의 불꽃이 뜨겁게 타오르는 공간 속의 대상들이다. 그것은 여러 겹의 의미의 층위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멀리 있어 좋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숨어 있다. ‘소녀’와 ‘불경’이 좋고 ‘시인의 달’과 ‘너의 노래’가 좋다고 말하면서 한편으로는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고 말한다. 여기서 화자가 좋아하는 대상의 성격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연필과 망치의 세계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전자는 관념의 세계이고 후자는 현실의 세계이다. 또한 ‘혁명’과 ‘철학’의 세계를 지향하는 화자의 내면이 잘 드러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사유의 일단이 섬세하게 감지되는 부분이고, 끝없는 일탈을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궁극의 지향점이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화자는 단순한 현실주의자도 아니고 뜬구름 잡는 정신주의자도 아니다. 명료하게 삶의 한 지점에 발 딛고 서서 현실과 관념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그러면서 삶의 지평을 활연히 펼쳐 보이는 시가 ‘그 머나먼’이다. 누구보다 시와 삶에 대한 고민이 철저했던 시인이 진은영이다. 이 시는 한때 시단을 가로지른 젊은 시인들의 시가 지나치게 자폐적 사고에 기인한 탓에 소홀했던 대자적(對自的) 혹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시의 영토 확장을 촉발하는 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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