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학의 「붉은장」감상 / 이진명
붉은장(葬)
송재학 (1955 ~ )
늙은 상인의 찌푸린 미간은 나를 닮았다
그의 붉은색 염료거래량은 확장 중이다
석 달 열흘쯤 나를 붉은색으로 물들여주겠다
는 미농지의 계약서를 보라
혀의 부적도 바꾸겠다고 속삭였다
우리는 붉은 궐련을 나누어 피웠다
우선 내 피를 보았다
확실히 묽은 핏방울은
세상의 통점에서 너무 멀어져왔다
그런데 붉은색이라는 것,
갇힌 방에서 사납게 북을 두들기는 발화(發話)의 슬픔과
가장 어둔 곳을 통과하는 일출과
제 뼈를 파고들며 불 밝히는 백열등의 전율과
마주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붉은색에 풍덩 뛰어들 때
붉은색만으로도 생은 쏜살같다
는 염료설명서를 그가 내밀었다
붉은색이니 모두 아가미 호흡이다
붉은 땀 흘리는 불수의근도 따라왔다
혹 남은 붉은색은 배롱나무 아래 묻으면 되리라
오늘 염료상인의 장기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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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장이란 붉은색을 장사 지내다라는 뜻일 텐데 시인이 만든 조어인 것. ‘붉은장’이라는 전대미문의 장례의례에 난생 처음 참가해볼 수 있는 건 순전히 언어창조 기술자 시인 덕분. 이 시는 시인의 분홍, 하양, 노랑, 초록 등 색깔과 죽음에 대한 탐구시 중 붉은색 편인 것. 늙은 염료상인과 붉은색 염료 거래 장기계약을 맺는다. 붉은색 염료만이 아닌 그 양에 대해서까지다. 피도 혀도 붉은색. ‘숨 쉬는 아가미’ ‘가장 어둔 곳을 통과하는 일출’, 마지막 계약서 도장의 인주도 붉은색. 붉은색과 장기계약 맺지 않으면 우리 살 수 없다. 살 수 없으면 죽을 수도 없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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