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제림의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평설/ 홍일표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
윤제림
올림픽 경기 중에 마라톤만큼 단조로운 경기도 없다. 신문 한 장을 다 읽도록 드라마 한 편이 끝나도록 같은 장면이다. 땀 얼룩의 일그러진 얼굴과 뜨거운 대지를 두드리는 나이키 운동화 아니면 검은 맨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시 쓰기만큼 쓸쓸한 종목도 드물다. 시의 객석은 선수가족과 동창생들 몇이서 깃발을 흔드는 고교축구대회장 스탠드를 닮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섹스를 보라. 마라톤만큼 시 쓰기만큼 단순하고 오래된 경기지만,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
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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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 대한 사색
르누아르는 봄의 풍경을 즐겨 그렸습니다. 그는 봄 햇살의 발랄한 색채를 가장 잘 표현한 서양화가로 꼽히지요. 말년에 관절염으로 고통 받았던 르누아르는 "그렇게 아픈데도 꼭 그림을 그려야겠느냐"고 묻는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네."
이 땅의 시인들은 왜 시를 쓸까요? 시를 읽지 않는 시대, 대형서점에서도 시집 코너를 대폭 축소하고 그나마 한쪽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천덕꾸러기 시. 그 시를 붙들고 오늘도 많은 시인들이 밤을 새워가며 글을 씁니다. 언론의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도 아니고, 넉넉한 경제적 대가도, 세인들의 관심도 없는데, 시인은 운명처럼 계속 시를 씁니다. 뚜벅뚜벅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걸어갑니다.
얼마 전 대구의 김선굉 시인은 어느 시 잡지에 발표한 <개망초꽃 여러 억만 송이>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시인은 좆도 아니여’로 끝맺고 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은 시적 레토릭이지만 시인은 또 다른 지면에서 “시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이 무엇에 기대어 여기까지 흘러올 수 있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시는 시인에게 삶의 존재 이유입니다. 시는 언제든지 시인을 받아줍니다. 내치지 않습니다. 때로는 힘이요, 용기입니다. 아무 것도 기댈 것 없는 현실 속에서도 시는 삶의 큰 기둥이요 푸근한 어미의 가슴입니다. 이것이 ‘좆도 아닌’ 시에 시인들이 목매는 이유입니다.
윤제림 시인의 재미있는 시를 소개합니다. 「세 가지 경기의 미래에 대한 상상」은 우선 재미있고 쉽습니다. 화자는 마라톤과 시 쓰기, 그리고 섹스를 시의 화두로 꺼냅니다. 마라톤은 지극히 단조로운 경기지요. 조간신문을 읽고, 이성아의 소설「절정」을 다 읽을 때까지도 마라톤은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스럽고 외로운 고행의 맨발은 뜨거운 대지를 두들기며 앞을 향해 내달립니다. 악전고투의 싸움이지요.
시는 어떤가요. 화자는 “시의 객석은 선수가족과 동창생들 몇이서 깃발을 흔드는 고교축구대회장 스탠드를 닮았다.”라고 말합니다. 독자가 떠난 시마당은 쓸쓸합니다. 고작 주변의 몇 사람만이 시인의 외로운 고투를 눈여겨 봅니다. 모두 어렵다며 시를 읽지 않습니다.
화자는 끝으로 섹스 이야기를 꺼냅니다. 기발하지요. 단순하고 오래된 경기인 섹스를 시의 운명과 연결시키는 시인의 도발적 상상력이 놀랍고 흥미롭습니다. 독자는 이쯤에서 무릎을 치며 공감합니다.
세 경기의 공통점은 “아무도 이 경기의 미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 이어질 것이라고 시인은 믿고 있습니다. 참으로 쓸쓸하고 오래된 경기지만 존속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외로우나 뜨겁기” 때문이지요. 그 뜨거움이 곧 생명을 이어가는 원동력이겠지요.
다시 한 번 르누아르의 말을 떠올립니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네."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전문지 『시로 여는 세상』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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