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겸의 「붉은 추억」감상 / 이진명
붉은 추억
정겸 (1957 ~ )
경기도청 신관 앞 유토피아 정원
배롱나무는 입고 있던 꽃무늬 블라우스의 앞단추를 서둘러 풀어내고 있다
쏟아지는 붉은 웃음들
잘 익은 바람이 꽃술 살며시 만지고 간다
꽃잎과 꽃잎 사이를 비집고 힐긋 고개를 내민 도정 홍보판
동탄에서 강남까지 18분, GTX*
날씬한 기차가 시간을 조각내며 힘차게 달리고 있다
그녀가 배롱나무 아래서 비스듬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바람에 살랑거린다
간지러움에 배롱나무 덩달아 흔들거린다
사진 한방 찍는 사이, 서 있던 배롱나무
그녀를 와락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니, 세상에나 벌건 대낮에 저렇게 진한 포옹을 하다니"
그녀의 가슴에 꽃잎자국 선명하다
꽃잎에 입을 맞춘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백일홍 꽃잎 정말 맛이 있다고 이렇게 달콤한 입맞춤은 처음이라고”
그녀는 나에게 백일간의 외도를 허락해 달라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목백일홍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녀가 배롱나무라 했다
나는 목소리를 돋워 간지럼나무라 했다
나무와 나무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내가 빙고게임을 하는 사이
시간의 틈새는 붉게 벌어지고
내 생을 뜨겁게 달구었던 나의 여름은 갔다
————
* 경기도가 제안한 수도권광역급행철도
—《寓話, 혹은 羽化》빈터 동인지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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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청 앞에 유토피아라는 정원이 있나 보다. 복낙원(復樂園)하고 싶은 인간의 꿈이 그 정원에 특히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나 보다.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블라우스 단추 풀어내듯 에로틱하게 피워내면 남녀들 그 배롱나무 아래서 사진 박고 입맞추고 젊음의 빙고게임 놀이. 그러나 붉고 뜨거웠던 여름, 젊음은 ‘동탄에서 강남까지 18분, GTX’라는 낯선 문구가 들어와야 했던 것처럼 빠르게 지나갔다고.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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