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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불가해한 사랑에 바치는 연가(戀歌)들

by 솔 체 2017. 7. 27.

이가림 시집 『바람개비 별』

불가해한 사랑에 바치는 연가(戀歌)들

 

      강 인 한 (시인)

 

 

 

   태양이 가장 크고 밝은 별이 아니란다. 태양의 밝기보다 10만 배가 더 밝고 그 무게는 태양의 25배가 되는 별이 발견되었다. 1998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연구팀이 하와이에 있는 직경 10미터의 케크망원경으로 지구로부터 4천 8백 광년 떨어진 거리에 있는 바람개비 별(WR104)을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 그 해 4월과 6월에 촬영한 사진에는 이 별이 바람개비 현상을 일으키는 모습과 바람개비 전체가 회전하는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한다.

   우리가 몰랐던 신비로운 이 천체 과학의 비밀을 처음 대하는 순간 그것은 경악의 감정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또 다른 우주가 있고 그에 대한 발견은 샘솟는 의문과 의문에 대한 끝없는 탐구로 우리를 몰아가는 것이다. 몰랐던 엄청난 존재에 대한 발견. 그 존재에 대한 인식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 것일까. 시인은 그것을 과학이나 종교가 아닌 인간의 마음 곧 정서로 변용하여 시로써 아름답게 구현해 낸다. 이가림의 연작 「바람개비 별」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끊을래야 끊을 수 없고 잊을 수도 없는 불멸의 사랑이다. 이 세상에서의 현존하는 사랑과 내세의 초월적인 사랑, 그 이상의 불가해한 사랑인 것이다. 그러한 사랑의 발견이 곧 ‘바람개비 별’인 것이다.

 

 

      바람구두를 신고

      굴렁쇠를 굴리는 사나이

      늘 마음의 귀 쏠리는 곳

      그 우체국 앞 플라타너스 아래로

      달려가노라면,

      무심코 성냥 한 개비

      불붙이고 있노라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마중 나오듯

      그렇게 마중 나오는

      그대의 신발 끄는 소리……

 

      저 포산(包山) 남쪽에 사는 관기(觀機)가

      불현듯 도성(道成)을 보고 싶어 하면

      그 간절함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떡갈나무들이 북쪽으로 휘이고

      도성 또한 관기를 보고 싶어 하면

 

      그 기다림

      바람으로 불어 가

      산등성이 상수리나무들이 남쪽으로 휘이는 것

      옛적에 벌써

      우리 서로 보았는가

 

      내가 보내는 세찬 기별에

      그대 사는 집의 처마 끝이나

      그 여린 창문이 마구 흔들리는

      뜨거운 연통관(連通管)이 분명 뚫려 있어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달려가는

      내 눈먼 굴렁쇠여!

 

                             —「바람개비 별 4—마음의 귀」전문

 

 

   여기서 시인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비슬산(포산)의 우정이 돈독했던 두 스님의 설화를 인용하며 마음의 신비로움을 끄집어낸다. 그 신비한 설화를 바탕으로 깔면서 시적 화자는 “눈으로 약속한 시간에” 마중 나오는 그대를 향해 눈먼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마음의 결합이 항상 실현되며 시인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지는 못한다. 「바람개비 별」의 연장선상에 또 다른 연작 「투병통신(投甁通信)」이 있다. 병 속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던지는 행위는 기대를 담고는 있으나 원하는 수신자에게 꼭 편지가 전해진다는 보장을 할 수가 없다. 그러한 막연한 기대와 자기 마음의 기록을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띄우는 행동의 그늘에는 은은한 비애와 하염없는 사랑의 문양이 비친다.

 

 

      이제

      내 비소(砒素)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달빛 인광(燐光) 무수히 떠내려가는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먼 훗날

      부질없이 강가를 서성이는 이 있어

      이 병을 건져 올릴지라도

      그 때엔 벌써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져 버렸을 것을 믿는다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 쉬는 것

 

      이제

      내 비소 같은 그리움을

      천년 종이에 싸

      빈 술병에 넣어

      일찍이 미친 사내 하나 빠져 죽은

      달래강에 멀리 던진다

 

                        —「투병통신(投甁通信) 1」전문

 

 

   이만큼 치열한 사랑의 고백이 또 어디 있는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이야말로/ 영원히 숨 쉬는 것”이라고 시적 화자는 말한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독극물 같은 그리움을 고이고이 천년을 견디는 종이(한지에 쪽물을 들인 감지紺紙)에 싸서 빈 술병에 담는다는 건 오랜 세월에도 변치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먼 훗날 그 병을 건져 올렸을 때는 글자들이 물에 씻겨 사라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스스로도 이렇듯이 간절하며 애타는 마음과 행위가 저 상고시대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 속에 나오는 원형 심상과 흡사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시인은 그 치열한 그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의 정체 또는 본질’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촛불소묘 1」을 통해 살펴본다. “패러데이가 실험 삼아/ 두 개의 촛불을/ 하나의/ 불꽃으로/ 합쳐 보려 했으나// 한사코/ 홀로 고고히 타오르는 걸/ 억지로 막을 수 없었다”고 하는 원천적인 고립과 고독으로 시인은 해명한다. 시인의 이 다섯 번째 시집 『바람개비 별』의 가장 핵심에 고독한 실존으로서의 사랑을 노래한 시들이 자리잡고 있음은 「시인의 말」에서 “……또 한 번의 간절한 연가집(戀歌集) 또는 비가집(悲歌集)을 막막한 세상의 바다에 던지게 되었다.”와 같은 언명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196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빙하기(氷河期)」가 당선되어 등단한 시인은 그 동안 『빙하기(氷河期)』(1973),『유리창에 이마를 대고』(1981),『순간의 거울』(1995),『내 마음의 협궤열차』(2000) 등의 시집을 출간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루앙대학교에서 불문학 박사 학위를 받는 등 남다른 프랑스문학 및 문화 전반에 걸친 폭넓은 이해는 시인의 작품 편편마다 배어있다. 발레리가 보여주는 완벽한 시의 구조를 알게 모르게 시인이 추구해온 것은 지금 이 시집에서도 넉넉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시인이 남모르게 흠모하여 온 이브 본느푸아가 보여준 다이내믹하고 낭만적인 열정이 「돌의 꿈」「로프공의 하루」「멋진 식도락」같은 작품들, 그리고 연작 「순간의 거울」에 표백되었노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벌거벗은 바람이

      살짝 손을 내뻗어

      족두리꽃의 젖가슴을 어루만지고

 

      족두리꽃이

      살짝 손을 내뻗어

      바람의 맨살 허리를

      몰래 휘어 감는

      참 황홀한 애무의 한때를

      전주 설예원(雪藝苑) 안마당에서

      엉겁결에

      나는 엿보았네

 

      그대 이름은 풍접화(風接花)

      바람의 손길이 스쳐야

      비로소

      피가 도는 여인

      이 천지간

      저 혼자 몸부림쳐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아아,

      살갑게 간질이는

      바람의 수작(酬酌) 없이는

      족두리꽃 한 송이 피어나지 못함을

      전주 설예원 안마당에서

      문득 나는 엿보았네

 

                            —「순간의 거울 15 —풍접화」전문

 

 

   바람이 꽃을 애무하고 꽃이 바람에 감응하는 이 모습을 통해 시인은 남녀 간에 벌이는 성애의 극치를 넘어 만유 생명의 황홀한 교감(交感)을 그려내고 있다. 때때로 시인은 이 시집에 보면 유장한 세월에서 터득한 능청스러운 유머를 풀어놓기도 하는데 「갓길에 앉아서」「종소리」「파도리 고 씨의 팻말 읽기」등과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 번뜩이는 삶의 지혜를 매설해 놓음은 당연하지만 자칫 시적 긴장이 이완될 것 같은 우려가 스치기도 한다.

   하지만 45년 넘는 시력(詩歷)을 지닌 시인이 아닌가. 그런 우려는 한갓 뜬구름같이 허망한 기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풀어지려 하는 신발 끈을 다시 한 번 바짝 조여 신고, “수세식 변소에 팔려온 이 비천한 몸/ 억울하게 모가지가 부러진 채/ 유리컵에나 꽂혀 썩어가는 외로움”(「오랑캐꽃」)의 시간을 뜨겁게 기억하는 나 같은 친구가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그는 잘 알기 때문이다.

 

 

   —《문학과 창작》2011년 여름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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