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의 「무질서한 이야기들」감상 / 이진명
무질서한 이야기들
진은영 (1970~ )
“네 멋대로 자고, 담배 피우고 입 다물고, 우울한 채 있으려므나”
출처를 잃어버린 인용을 좋아해
단단한 성벽에서 떨어진 회색 벽돌을 좋아해
매운 생강과자를 좋아해
헐어가는 입과 커다란 발을
끊어져 흔들리는 철교의
빨갛게 녹슬어가는 발목 아래서나
썩어가는 두엄지붕들 위에서
저 멀리
평원에서
들소의 젖은 털 사이로 불어오는
달착지근하고 따스한 바람을
손가락으로 좋아해
아니라고 말하는 어려움을
모든 습작들을 좋아해
서툰 몸짓을
이사 가는 날을 좋아해
죽은 사람의 아무렇게나 놓인 발들의 고요를
그 위로 봉긋하게 솟은
공원묘지에 모여든 초록 유방들
산 자의 기침과 그가 빠는 절망의 젖꼭지를
좋아해
그러나 꿀과 눈이 섞이는 시간을
너의 얼굴에서, 목에서
허리에서
얼음 같은 파란색 흐르는 시간을 좋아해
우리가 타버린 재 속에
함께 굽는
마지막 청어의 탄 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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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별자리. 그 빛의 언어는 고백적인데 목소리 다정하고 몽상적이고 청신하다. ‘꿀과 눈’이 섞인 빛 뭉치의 시간 속에서 현실세계의 인과는 결락시키고, 무게도 부피도 지우고,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달콤함과 차가움의 세계를 자유롭게 운행한다. ‘얼음 같은 파란색 흐르는 시간을 좋아해’라는 문장은 표면의 기호의 차가움보다 먼저 몽상의 따뜻한 속을 더 지지하는 듯하고.
시 속의 세계를 더 사랑하게 된 시인의 사랑이 활동하는 방식은 제목처럼 현실세계 논리로는 무질서하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나 사랑인 한 그 어느 쪽의 세계에서도 아름다운 착란의 무질서 아닐 것인가.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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