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훈의 「내 쪽으로 당긴다는 말」감상 / 이진명
내 쪽으로 당긴다는 말
정철훈 (1959~ )
새벽이 차다 내가 자고 나온 방을 질질 끌고 나온 것 같은 새벽이다 동아줄을 어깨에 감고 무언가를 끌고 있는 느낌 일리야 레삔의 그림에서 배를 끄는 노예들 가운데 내가 끼어 있는 것 같다 실은 아무것도 끌지 않는데 내 쪽으로 끌어당겨지는 무언가가 있다 내 쪽이라는 말은 어느 정도 인간의 이기심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끌어당긴다는 것은 내 쪽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내 쪽으로 끌어당기는 포옹 내 쪽으로 흡착하는 입맞춤 내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고 있는 사랑한다는 말 말이 당겨진다는 것 당겨져 어깨에 얹힌다는 것 평생 노예가 되어 끌어당겨도 좋을 사랑한다는 말 동아줄이 자꾸만 짧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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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러시아 화가 일리야 레핀의 전시회에서 ‘볼가 강의 배 끄는 사람들’이라는 그림 본 적 있다. 배 끄는 지치고 헐벗음에 전 사람들의 강렬한 집단적 표정 기억난다. 화자 나는 무언가 불우에 침윤돼 있다. 새벽길 나서며 자기가 자고 나온 방을 질질 끌고 나온 것 같다고 하고, 동아줄을 어깨에 감고 배 끄는 노예들처럼 무언가를 끌고 있다고 하니. 노예 짓으로 세월만 끄는 불우의 인간, 타자인 세상이 포옹처럼 입맞춤처럼 내 쪽으로 당겨오지는 않는다는 고통스러운 인식. 목숨의 동아줄은 자꾸 짧아지는데, ‘평생 노예가 되어 끌어당겨도 좋을 사랑한다는 말’ 같은 아름답고 진실하고 화평한 것은 오지 않는가. 실은 어느 시구처럼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는 재촉 어깨에 얹어 당기는데….
이진명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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