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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 은 시 와 글

신용목 / 화분

by 솔 체 2017. 9. 24.

화분



신용목



어느 날 화분이 배달되었다

나에게도
땅이 생겼다 부드러운
흙, 나는
저기에 묻힐 것이다

화원 앞을 지나다 보면 유리창 너머
관짝들이 황홀하게 놓여 있다 아름다운 봉분처럼
자라는 나무들, 꽃들

스무 평의 적막에도 햇살과 바람이 흠모하듯 스며와
지금은 저기에 양란이 꽃을 피우고 등 구부린 시간이
신혼처럼 살고 있다

내 무덤은 향기로울 것이다
먼 나라의 춤을 추는 나비처럼은 아니지만,
언젠가 꽃이 진 허공, 그 맑은 높이에 나는
내 영혼을 띄워둘 것이다

저 둥긂을 안고 기다리면 아프지 않게 늙을 수 있겠다
수치를 꽃대처럼 비우고 나면
거친 그리움도 이제는 자연사할 수 있겠다, 있겠다

어느 날,
술 취한 발이 화분을 깨뜨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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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용목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에서
신용목 1974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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