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 광시곡
김형술
악몽에 쫓겨다니다
한밤중에 문득 깨어나 보면
파랗게 눈 부릅뜨고
머리맡에 앉아 있는 이
난 몰랐어요 밤마다 내 꿈속을
휘어진 나사못과 녹슨 철사뭉치
망치와 드라이버로 가득 채우는 게
당신이라는 걸
잠들기 전 분명히
완벽하게 죽여드렸었는데
죽지 않고 어둠 속을 걸어다니며
서재의 책들과 사진첩과 가계부
아이의 곰인형마저 먹어치우고
웃고 있네요 화병 속의 꽃을 시들게 하고
잠든 영혼들 속에
선명한 발자국을 찍으며
날개 대신 리모컨칩을 겨드랑이에 숨긴 채
아이들은 성급히 수염이 자라고
주체할 수 없는 허기에 시달리는 어른들을
강하고 단순한 어조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당신은
어느새 거인이 되어 있네요 머잖아
지붕을 뚫고 벽 밖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어깨를
우린 볼 수 있겠지요
인간의 날개와 눈물마저도
당신 가슴속에서만 재생산된다니
두려워요 이제 다시는
빼앗긴 꿈의 신화를 찾을 수 없나요
오 놀라운 전능의 네모난 신전
우린 모두 당신의 불쌍한 종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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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술 56년 경남 진해 출생. 9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의자와 이야기하는 남자』『의자, 벌레, 달』『나비의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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