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제는 비
문학 참고서재

이장욱의 「소규모 인생 계획」평설 / 홍일표

by 솔 체 2015. 8. 7.

이장욱의 「소규모 인생 계획」평설 / 홍일표

 

소규모 인생 계획

 

   이장욱

 

 

식빵 가루를

비둘기처럼 찍어먹고

소규모로 살아갔다.

크리스마스에도 우리는 간신히 팔짱을 끼고

봄에는 조금씩 인색해지고

낙엽이 지면

생명보험을 해지했다.

내일이 사라지자

모레가 황홀해졌다.

친구들은 하나 둘

의리가 없어지고

밤에 전화하지 않았다.

먼 곳에서 포성이 울렸지만

남극에는 펭귄이

북극에는 북극곰이

그리고 지금 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의 저편에서도

아기들은 부드럽게 태어났다.

우리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롭지도 않았네.

우리는 하루 종일

펭귄의 식량을 축내고

북극곰의 꿈을 생산했다.

우리의 인생이 간소해지자

달콤한 빵처럼

도시가 부풀어 올랐다.

 

--------------------------------------------------------------------------------------------------------

 

   양파, 대파, 쪽파에서부터 좌파, 우파, 영남파, 호남파 등 파자 돌림을 억수로 좋아하는 걸 보니 파가 몸에 좋긴 좋은가 보다. 얼마 전에 문학판은 미래파가 휩쓸고 지나갔다. 글쟁이들도 파의 매운 기운의 효과를 봤는지 그 위력이 대단했다. 이 자리는 미래파의 공과를 말하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다만 그 중심에 이장욱 시인이 있었다는 것, 그의 비평 이론이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만 밝혀둔다.

   이장욱 시인은 우리 시단에서 비평의 세례를 집중적으로 받는 황태자 그룹의 한 사람이다. 그는 시 뿐만이 아니라 소설과 비평 분야에서도 특유의 저력을 발휘하고 있는 시인으로 문단의 비상한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시는 모더니티의 극단에서 기존의 서정성을 낯설게 하는 첨예한 감각을 보여준다. 이러한 파격적인 어법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는 시적 감동이나 공감을 소홀히 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소규모 인생 계획」은 소시민의 옹색하고 서글픈 삶을 묘사하고 있는 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그야말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안하고 암울한 삶의 모습이다. 궁색한 일상은 빵가루를 찍어먹고 크리스마스에도 팔짱이나 끼고 거리를 배회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도 모자라 마침내 생명보험까지 해지하는 상황에 이르고 친구들은 전화도 하지 않고 하나둘 곁을 떠나게 된다. 먼 나라에서는 전쟁의 포성이 끊이지 않고 그 와중에도 아이들은 태어난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하나도 위대할 것 없는 ‘위대한 자들’을 혐오하느라 외로울 새도 없다. 온종일 생계를 위한 최소한의 양식만으로 ‘북극곰의 꿈을 생산’하고, 인생은 지극히 간소해진다. 그때 눈앞의 도시가 ‘달콤한 빵’처럼 부풀어 오르는 역설적 상황이 연출된다.

   이 시에서 화자는 현실과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소시민의 궁색한 삶을 묘사하면서도 주관적 감정의 노출을 피하고 현실 그대로의 상황을 보여준다. 즉 독자가 개인의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개입할 시적 공간이 그만큼 넓다는 것이다. 과거 공동체의 언어에 길들여진 독자는 개인의 주체적 언어가 낯설고 이물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과거 80년대의 언어로 오늘의 현실을 조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시적 언어도 진화할 수밖에 없다. 너무 노쇠해진 30년 전 언어는 이제 조용히 쉬게 두자. 그것이 과거 언어에 대한 예의이다.

 

홍일표 〈시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