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희의 「스승의 은혜」 평설 / 홍일표
스승의 은혜
황성희
전체적으로 보면 그것은 나무의 기억.
열매 대신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얼굴들.
이 순간을 포함해 분명한 것은 없나요?
내 손을 포함해 확실한 것은 없나요?
장군께서는 한산섬 달 밝은 밤 지키던 칼로
내 질문의 유명무실함을 단번에 베어주셨다.
가슴에 숨어 있던 붉은 사과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의사께서는 내 약지의 한 마디 가볍게 잘라내시곤
힘차게 짜낸 피로 이름 석 자 써보도록 독려하신다.
시간의 감옥에서는 그만한 하느님이 없다시며.
리비도를 들락거리던 심리학자께서는 즐거운 나의 집을 열창하는
어머니의 입에 오줌을 싸는 악몽으로 괴로워하는 나에게
의자를 이용한 하루 3번의 자위로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라 하신다.
물렁물렁한 시계의 현실적 대중화에 집착하셨던 화가께서는
내 친구의 아내를 연모해 보라 충고하시며
현실의 갈라가 없다면 초현실의 갈라도 없었겠지 콧수염을 만지신다.
이상향을 꿈꾸던 의적께서는 호부호형 속에 모든 실마리가 있다며
율도국은 다만 허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고백하신다.
한때 다방을 운영하셨던 시인께서는 권태를 이기고자 한다면
난해함은 기본이라며 불쑥 멜론을 내미시는데.
지금 내가 나무의 기억 말고
획기적 수미상관의 창조에 골몰해야만 하는 이유
더 이상 나열할 필요가 있을까.
—《시와 반시》2009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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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이데올로기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시가 있다. 황성희의 「스승의 은혜」는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풍자와 반어, 냉소의 눈길이 느껴진다. 모처럼 개성 있고, 재미있는 시를 만났다.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얼굴들’은 한때 나에게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들이다. 그들에게 화자는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다. 이순신 장군은 대답 대신 질문의 ‘유명무실함’을 베었고, 안중근 의사는 피로 ‘이름 석 자’를 써보라고 하며 ‘하느님’ 같은 절대성을 언술하고, 프로이트는 정신 분석의 처방을 내리고, 살바도르 달리는 애인 갈라를 끌어다 초현실의 이야기를 하고, 홍길동은 율도국이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하고, 이상은 권태를 이기는 법을 말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는 ‘획기적 수미상관의 창조’에 대해 언급한다. 이는 ‘얼굴들’에 대한 전면적 부정이다. 한 마디로 개똥이라는 말이다. 화자 스스로 내린 결론은 세상에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불분명하며 절대적 진리라고 하는 것도 없으며 인간의 삶은 그저 모호하고 불투명한 가운데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즉 주체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 이러한 현실에서 화자가 선택하는 것은 획기적인 창조이다. 즉 과거의 무수한 영향과 연결 고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부터 시인의 고민은 다시 깊어지는 것이다.
이 시는 풍자와 반어로 이데올로기와 미학적 규범, 교조화된 사회 윤리, 현실 세계의 허구성 등을 비판하면서 존재론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작품이다. 단순히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나 병폐 등을 비판하는 단선적 경향의 시들과는 큰 차이가 있다.
논리적, 형이상학적 주체가 허구라고 선언한 니체는 인간은 ‘단 한 번의 존재, 비교할 수 없는 자, 자기 스스로 입법하는 자, 자기 스스로 창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체는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창조적 주체’ ‘자율적 주체’를 지향하는 황성희 시인은 일단 자기만의 고유한 영역을 개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땅을 옥토로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불면의 밤을 견뎌야 할 것이다. 다른 젊은 시인들과 차별화된 시적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그의 다음 작품이 어느 방향으로 향할지 자못 궁금하다.
홍일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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