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상징의 힘 / 홍일표
쿠키들의 접시
이 원
정오와 자정 사이
달콤함과 웅성거림
고소함과 단단함
테이블과 흐느낌 사이
바삭,
부서질 수도
퉁퉁 불어터질 수도
분비물까지 뒤집어쓰면서
나는 쿠키입니다 불의 뜨거움으로 탄생한
나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울겠습니다
눈물도 없이
여행용 가방 속
덜컹거리면서
저며진 살
비좁은 통로
교통량이 점점 늘어난다
흐릿한 밤
달이 내내 따라오고 있을 것
파도 소리를 상상했어요
벽은 빛마저 빨아들인다
이런, 또 사막에 놓일 줄이야
모래는 내 안에도 충분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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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현은 일찍이『전체에 대한 통찰』에서 “수사는 역겨움을 불러일으키고, 구호는 시들게 마련이지만 뜨거운 상징은 비슷한 정황이 되풀이될 때마다 새로운 반응을 불러일으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반응이 곧 문학의 위대한 힘이겠지요.
문학은 통상적이고 관습화된 삶의 구각을 깨고 뜨거운 상징으로 세계의 실상을 보여줍니다. 이원의 「쿠키들의 접시」는 적확한 묘사로 있는 그대로의 삶의 풍경을 건조하게 드러냅니다. 이 시에는 감정의 과잉도 과도한 관념의 노출도 보이지 않지요. 이 점은 이원 시의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쿠키’는 곧 시적 자아이며 동시에 사랑입니다. ‘불의 뜨거움’으로 탄생한 ‘사랑’은 쉽게 부서지는 속성을 지닙니다. 화자는 지금 불화의 현실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달콤함과 웅성거림’이 있던 공간을 떠나 ‘여행용 가방 속’처럼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가면서 그저 ‘달’을 생각하고 ‘파도 소리’를 상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시적 자아가 다른 존재의 공간으로 옮겨갈 수 없을 만큼 비극적입니다. 게다가 또 다른 현실의 벽과 맞닥뜨리게 되지요. 그 벽은 한 줄기 빛마저 빨아들이는 절망적 현실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런, 또 사막에 놓일 줄이야
모래는 내 안에도 충분하다고!
이원 시에 자주 등장하는 사막이 여기서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막’은 시적 자아가 살고 있는 현실이지요. 결코 행복하지 않은 공간이고, 그 자리에 ‘나’는 버려지듯 다시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현실에서 찢겨진 존재로 살아가며 실재와 비실재의 간극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번민의 시간을 감내합니다.
‘나’는 모래가 가득한 육신이고, 시적 자아가 놓인 자리는 여전히 ‘사막’일 따름입니다. 어디서도 ‘파도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옹색하고 뒤틀린 삶의 공간에 광활하고 아름다운 삶의 무늬는 부재하지요. 다만 모래 버석거리는 생을 아프게 확인하는 자리, 그곳은 어느덧 12월의 끝자락입니다.
홍일표
(문화저널 21 편집위원. 199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등단.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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