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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참고서재

그리움 / 유치환

by 솔 체 2020. 1. 7.

그리움


유치환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

유치환 [柳致環, 1908.7.14~1967.2.13]


1. 생애


유치환은 1908년 경남 통영의 태평동에서 한의였던 유준수의 8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다. 장남은 극작가인 유치진이다. 그의 부친은 본래 거제군에서 살았으나 결혼한 뒤에 처가가 있던 통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그는 외가에서 태어나 11세 때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 그는 말이 별로 없는 소년이었다. 학교 종이 울리더라도 뛰어가는 법이 없이 조용히 걸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로 들어갔다. 그가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교에 입학한 것은 1922년이다. 그의 형 유치진은 3학년에 재학중이었다. 그의 내성적 성격은 중학 시절에 더욱 심화되었다. 일본인 친구들을 사귀는 대신에 그는 혼자 책을 읽고 무언가를 쓰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이듬해 관동대지진을 맞이했고, 그 때 그는 일본인들에 의해 아무 죄도 없는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 후 그는 주일학교에서 만난 소녀에게 매일같이 편지를 보낸다. 그 소녀는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된 권재순이다. 도요야마 중학 4학년 때 부친의 사업이 기울자 그는 귀국하여 동래고보 5학년에 편입한다. 그는 1928년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진명 유치원의 보모로 있던 권재순과 결혼한다. 그 당시에는 드문 신식 결혼식이었다. 이 결혼식 때 신랑신부 앞에 꽃바구니를 들고 서 있던 어린아이 중의 하나가 훗날 시인이 된 김춘수이다. 권재순과 결혼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아나키스트들의 작품을 보고 이듬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런 후 그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들과 정지용의 시에 깊은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청마는 1931년 24세 때「문예월간」2호에 「정적」이라는 시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데뷔하게 된다. 이 때 청마는 비슷한 또래의 통영 문학청년들과 어울려 다니며 술을 마시곤 했다.


그의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던 아내는 시아버지와 청마를 설득하여 거처를 평양으로 옮긴다. 청마는 평양에서 사진관을 경영했으나 여의치 않자 이내 걷어치우고 시를 짓는 데에만 전념한다. 그의 아내는 청마에게 평양의 신학교 진학을 권유했으나 그는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거절한다.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긴 것은 1934년이고, 부산화신연쇄점에 근무한다. 30세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 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되는 것을 계기로 이후 교육계에 종사하게 된다.


문예동인지 생리(生理) (창간 1937. 7. 1.)를 주간하기도 했던 해였다. 그러나 그 다음해 여자 문제가 얽힌 데다가 통영경찰서에 근무하던 남 순사란 사람으로부터 그가 일제의 예비 검속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음을 귀띔 받고 가족들을 거느리고 인생을 다시 한 번 재건해 보려는 의도로 만주로 떠나게 된다. 만주의 연수현에 형 유치진의 농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곳에서 일을 한다. 광복 직전인 45년 6월에 귀국하여 광복을 맞이하였고 통영여자중학교 교사(1945. 10. ∼ 1948)가 된 그는 11월에 윤이상, 김춘수 등과 같이 통영문화협회를 조직하고 그 회장이 되어 문화유치원(그의 부인이 경영)을 포함하는 4동의 적산을 인수하고 '연극 부락' 중심의 예술 활동을 벌인다. 39세 때는 제 1회 시인상을 받았으며 41세 때인 1948년엔 청년문학가 협회 회장직을 맡아 반공 민족 문학의 선두에 서기도 했다.


50년 북한 남침으로 부산으로 피난한 그는, 그 곳에서 문총 구국대 조직에 참여한 후 3사단과 함께 종군하여 원산, 함흥 등지로 병사들과 함께 전쟁의 아픔을 겪었다. 이 경험으로 잘 알려진 시 '보병과 더불어'(50), '돌아오지 않는 비행기'(50. 4.) 등이 쓰여졌다. 48년에 교직을 그만두었으나 54년에 거창 안의중학교 교장(54∼55)이 되었다. 그 후 그는 경주고(55∼61), 경주여중(61∼62), 대구여고(62∼64) 등 사학의 교장으로 있다가 경남 문교 사회국장이던 오복근의 주선으로 경남여고(64) 교장으로 옮겼다. 청마가 세상을 뜬 것은 1967년 2월 13일이었다. 그날은 고교 후기 입시날이었다. 부산남여상 교장으로 있던 청마는 학교일을 마치고 예총 일로 몇몇 문인을 만났고, 그들과 어울려 몇 군데 술집을 들렸다. 그런 후 그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던 청마는 좌천동 앞길에서 한 시내버스에 치였고 부산대학 부속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절명했다. 같은해 17일 부산시 사하구 하단동 산록에 묻혔다.

그후 이장하여 현재는 경남 거제시 둔덕면 빙하리 산록에 묘지가 있다


청마 유치환은 사진관 경영, 화신 연쇄점 사원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 교직에 있었다. 통영 협성상고와 통영여중에서 4년쯤 교단에 섰고, 경주고 교장이 되기 전 한 학기쯤 경북대에서 강의를 맡은 경력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의 교직 경력은 교장이었다. 통영 문화협회에서 인수한 적산을 사유화하여 그의 아내가 경영하게 만든 사건이나 여러 차례 여성과 불륜관계를 빚는 등 인간적인 약점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는 존경받는 교육자였고, 지사적인 시인이었다.



2. 주요 작품

(1) 시집

-
청마시초, 1939.
- 생명의 서, 1946.
- 을릉도, 1948.
- 청령일기. 1949.
- 보병과 더불어, 1951.
- 청마시집, 1954.
- 기도가와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1954.
- 제9시집, 1957.
- 유치환선집, 1958.
- 동방의 느티, 1959.
-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1960.
- 미루나무와 남풍, 1964.
-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1965
.

(2) 수필집

- 예루살렘의 닭, 1953.
- 동방의 느티, 1959.
- 나는 고독하지 않다, 1963.


(3) 서간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

* 유치환 사후 시조시인 이영도가 오랜세월 유치환으로부터 받은 편지5000여통 중

200통을 추려 엮은 서간집으로베스트셀러가되었음.

3. 주요 유적지



- 경주불국사 시비 건립, 1967.
- 부산남여상 시비 건립, 1967.
- 경주고등학교 교훈비 건립, 1967.
- 부산 에덴공원 시비 건립, 1974.
- 충무 남망공원 시비 건립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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